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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가는 길

    산골 마을의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하늘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온기가

    저 하늘에 모여 있는 듯,

    유난히도 찬란한 노을이었다.

    그 붉은 하늘을 가르며

    이름 모를 새들이 짝을 지어

    어디론가 바삐 날아간다.

    노을은 하늘을 물들이고,

    새들은 저마다의 둥지를 향해

    쉼 없이 날갯짓을 이어 간다.

    그 한 폭의 풍경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게 저물 수 있고,

    모든 생명은 하루의 끝에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재촉하는구나.

    새는 둥지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며,

    우리의 영혼은

    언젠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오늘 노을은

    저무는 빛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

    조용히 가르쳐 주고 있었다.

    오늘 노을은

    저무는 빛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을

    조용히 가르쳐 줍니다.

  •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애굽기 16:3)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주려 죽게 되었다’며 불만을 터뜨립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그들이 곧바로 원망했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악해서라기보다 눈앞의 ‘생존의 위협’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어제의 은혜보다 오늘의 결핍을 먼저 바라보게 합니다.

    1. 기적보다 민감한 ‘당장의 빵’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거)보다 당장 내 손에 들린 빵(현재)에 더 민감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통장 잔고나 자녀 문제, 건강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께 받은 은혜보다 눈앞의 현실에 더 사로잡혀 불안해합니다. 기억은 단기적이고 불안은 본능이기에, 어제 받은 큰 은혜도 우리는 아주 쉽게 잊어버리고 눈앞의 현실에 삼켜지곤 합니다.

    2. 비판 뒤에 숨은 나의 불안

    우리가 타인을 향해 서슴없이 ‘믿음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일지 모릅니다.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에, 타인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라는 착각 속에서 안도감을 찾는 것이지요. 결국 타인을 비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똑같은 불신과 원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3. ‘목이 곧은 백성’, 바로 나 자신

    그러므로 ‘목이 곧은 백성’은 멀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을 보며 “믿음이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어쩌면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나 역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는 나의 본성을 숨기려는 연기일지도 모릅니다.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망하는 이들을 보며 비판하기보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들의 불안이 곧 나의 불안입니다. 하나님,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듯 나의 마음도 붙잡아 주시옵소서.”

    4. 오늘의 고백

    성경을 읽으며 그저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라고 결론 내리는 대신, 이렇게 고백해 봅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을 보며 믿음 없다고 손가락질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곧 나의 민낯이었고, 우리는 매일 기적을 경험하고도 매일 원망하는 목이 곧은 자들입니다. 선지자를 배척하고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던 사람들을 보며, 만일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고백합니다.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 진실한 고백 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을 선물처럼 사는 하루살이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강가, 수천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무리를 지어 허공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황금빛 노을을 배경으로 격렬하게 춤을 추는 그들의 몸짓은 마치 공중에 뿌려진 반짝이는 모래알 같았다. 

    문득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이면 생을 마감한다는 짧은 운명. 저토록 치열한 춤의 끝이 고작 몇 시간 뒤의 죽음이라니, 어쩐지 허무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가만히 멈춰 선 내 어깨 위로 지친 하루살이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투명하고 가느다란 날개를 유난히 파르르 떨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삶은 억울하지 않니? 내일이라는 아름다운 아침을 보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그러자 바람결을 타고 하루살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인간들은 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내일’을 안타까워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하루’가 곧 평생이자 우주랍니다. 우리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낭비하지 않아요. 지나간 어제를 후회하며 슬퍼할 시간도 없지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니까요.” 

    그 짧은 울림은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루살이에게는 과거에 대한 미련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그저 지금 흐르는 바람을 느끼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노을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현재를 가장 밀도 높게 살아갈 뿐이었다.

     반면 백 년 가깝게 살아가는 인간인 나는 어땠는가. 

    이미 지나가 버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붙잡고 괴로워하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걱정을 미리 끌어다 쓰느라

    정작 가장 소중한 ‘오늘’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지 않았던가.

    어깨 위의 작은 생명은 다시 한번 날개를 폈다.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짜 내며 동료들이 있는 황금빛 허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녀석에게는 그 마지막 1분, 1초가 평생과도 같은 무게였을 것이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없기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일이 없기에 매 순간을 온전히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존재였다.

    그날 밤, 강가를 돌아 나오는 길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루살이가 남겨준 지혜 덕분이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의 삶도 거대한 우주의 시간 안에서는 그저 찰나의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만끽하느냐이다. 

    가슴속에 하루살이의 투명한 날갯짓을 품어본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게 맡기고, 오늘이라는 기적을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 생명이 있는 한, 바닷물은 스며들지 않습니다

    바닷물은 그토록 짜지만, 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살은 전혀 짜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숨이 멎어 생명이 다한 물고기는 곧 바닷물의 짠기를 그대로 흡수해 버리고 맙니다. 생명이 있을 때는 스스로를 지켜내던 힘이, 생명을 잃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은 때로 바닷물처럼 짜고, 거칠고, 오염되어 있습니다. 주변 환경이 너무 타락해서, 혹은 세상이 너무 삭막해서 내 마음도 어쩔 수 없이 물들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영적으로, 마음의 중심을 잡고 깨어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오염시키는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안의 생명력이 희미해질 때입니다.

    자신의 신념, 따뜻한 온기, 그리고 나를 지키는 그 단단한 정신만 살아있다면,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세상의 파도에 지쳐가고 있나요?

    그렇다면 밖을 탓하기보다, 내 안의 ‘생명력’이 안녕한지 한번 살며시 들여다보세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세상의 짠기를 이겨내고 있는 가장 위대한 증거이니까요.

  • 매미의 노래

    요즘은 아침마다 매미 소리에 잠을 깹니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창문을 닫아도 소리가 그대로 들려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시끄럽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멈추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 막히는 더위입니다.

    사람도 에어컨을 찾고, 선풍기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날씨인데,

    저 작은 매미는 온종일 나무에 매달려 자신의 몸을 떨며 울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제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얼마나 힘들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매미는 원래 그렇게 우는 거야.”

    맞는 말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그들의 본능이며,

    짧은 생을 이어 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 하나로 제 마음까지 무뎌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안다고 해서,

    그 생명의 고단함까지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땅속에서 긴 시간을 견디다가,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와

    한철을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생명.

    그 마지막 시간을

    저토록 뜨겁게 노래하고 있는데,

    어찌 아무 감정 없이 지나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창밖에서는 매미가 웁니다.

    누군가는 여름의 소음이라 말하지만,

    제게는 생명이 마지막까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절규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귀를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먼저 젖어 듭니다.

    얘들아…

    오늘도 참 애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다는 말로 지나칩니다.

    계절도,

    바람도,

    작은 생명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는

    하찮은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매미 한 마리의 울음도,

    들꽃 한 송이도,

    이름 모를 새 한 마리도

    모두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오늘 아침,

    매미 소리를 들으며 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작은 생명을 향해서도

    마음이 무뎌지지 않게 하소서.

    생명의 울음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창밖에서는 지금도 매미가 웁니다.

    아마 내일도,

    그다음 날도 울겠지요.

    그 소리가 여름의 소음으로만 들리지 않고,

    짧은 생을 다해 살아가는

    한 생명의 마지막 노래로 들린다면,

    우리의 마음도 조금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 지휘봉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

    한때 저는 꽤 까다로운 성가대 지휘자였습니다.

    성가대원들의 작은 음정 하나, 미세한 박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틀린 음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했고, 흐트러진 박자는 정확하게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제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화음보다 대원들이 실수했던 장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금만 더 정확했더라면…’

    ‘한 번만 더 맞추었더라면…’

    언제나 제 관심은 더 완벽한 찬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가대 연습을 인도하던 중 제 마음에 질문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지휘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제 마음을 깊이 흔들었습니다.

    혹시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찬양의 본질보다 음악적인 완성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은 오랫동안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성가대는 「사명」이라는 찬양을 연습하게 되었습니다.

    지휘를 하며 가사를 따라가던 중 한 구절에서 제 손이 멈추었습니다.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그 순간 그 가사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들려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는데,

    나는 대원들이 음정을 틀렸다는 이유로 쉽게 실망하고,

    박자가 흔들렸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작 삶에 지쳐 힘겹게 예배당에 나온 대원들의 마음은 한 번도 깊이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지휘자가 가장 먼저 맞추어야 하는 것은 음정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후 제 지휘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중요합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예배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찬양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화음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지휘대에 서면 먼저 지휘봉보다 대원들의 눈을 바라봅니다.

    삶에 지친 사람은 없는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부족한 화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흔들리는 음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품는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찬양을 가장 아름답게 받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성가대는 완벽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기도합니다.

    우리의 찬양이 사람의 귀를 만족시키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 거울 속에 남은 시간

    어릴 적 나는 거울을 참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거울 속에는 왠지 또 다른 세상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손을 뻗으면 거울 속 아이도 똑같이 손을 뻗고, 내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함께 울어줄 것 같은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순수하게 믿었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참 속도도 없이 흘렀다.

    거울 속에는 호기심 가득하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수줍음과 풋풋함이 전부였던 사춘기 소녀의 시간도 머물다 갔다.

    기쁨으로 반짝이던 날들과 남몰래 흘렸던 눈물로 얼룩진 시간들도 차례로 거울의 눈을 거쳐 갔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바라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가에 자리 잡은 잔주름,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예전 같지 않은 얼굴의 선들.

    젊었을 때라면 애써 외면했을 흔적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들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저 주름 하나에는 웃었던 날들이 있었고,

    또 다른 주름에는 마음 아파 울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했던 날도 있었고,

    상처를 받고도 다시 일어났던 날도 있었다.

    아이들을 걱정하며 밤을 지새운 날도 있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를 묵묵히 견뎌낸 날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남은 것은 단순한 주름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좋은 얼굴이라고 말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람의 진짜 얼굴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이 조금씩 빚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이 웃은 사람에게는 웃음의 흔적이 남고,

    많이 사랑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눈빛이 남는다.

    많은 것을 견뎌낸 사람에게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생기고,

    아픔을 지나온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하나씩 사라지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조금씩 얼굴 밖으로 드러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나는 거울 속에 또 다른 아이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아이를 지나온 수많은 날들이 함께 서 있다.

    문득 알 것 같다.

    거울은 얼굴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을 만들어 온 삶까지 비추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는 거울 앞에서

    주름을 지우려고만 하지 않으려 한다.

    그 주름 하나하나가

    내가 살아냈다는 증거일 테니까.

    오늘도 거울 속의 나에게 가만히 미소를 지어본다.

    어릴 적 거울 속 친구에게 그러했듯이.

    “참 오래도 함께 살았구나.”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거울 속에 있는 이 얼굴도

    언젠가는 지나간 한 시절의 얼굴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남은 날들도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훗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 비친 얼굴이

    내가 살아온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이기를 바라면서.

  • 당신의 마음은,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나요?

    광야 같은 거친 세상을 걷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막’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짓게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엄격한 규정과 질서가 가득한 장소였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보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들의 한가운데로 직접 찾아와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시려는, 어떤 거대한 사랑의 흔적이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완벽하고 거룩한 존재가 왜 굳이 흠 많고 불안한 우리들의 삶 한가운데 머물길 원하셨을까요? 그저 멀리서 지켜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그분은 성막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와 끊임없이 눈을 맞추고 대화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필요가 아닌, 오로지 우리를 위한 ‘다정하고도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그분께서 스스로 만드신 사랑의 징검다리였던 셈입니다.

    그 마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집니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가 외로울 때, 길을 잃었을 때, 혹은 세상 속에 치여 나 자신을 잃어갈 때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셨으니까요.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맞이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매일 쏟아지는 일상의 걱정과 욕심으로 마음의 방을 가득 채우다 보니, 정작 내 곁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요.

    “당신은 오늘, 당신의 마음속에 그분을 위한 작은 자리를 마련해 두었나요?”

    질문은 단순하지만, 그 울림은 참 묵직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사랑 때문일 테니까요. 거창한 종교적 형식을 떠나, 오늘은 그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잠시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일상이 그 사랑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마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요한 평안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라는 사람 그 자체가, 그분이 머무시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초록 대지 위 작은 별, 민들레의 노래

    바짝 땅에 붙어 피어 있는 민들레

    높이 뻗은 장미도

    소담스럽게 피어난 함박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난쟁이 같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모서리 땅이든

    아스팔트 사이든

    각박한 환경 속에서도

    길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자리를 잡는다.

    왜 하필 여기냐고

    구석에 핀 나를 왜 봐주지 않느냐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좋단다.

    그 자리가 감사하단다.

    화려한 계절의 찬사가 지나간 자리,

    다른 꽃 다 져도

    민들레는 하얀 날개를 달고 또 다른 곳을 향해 의연하게 날아간다.

    그 찬란한 여정의 뒤를 따라

    봄바람을 품은 윙윙거림이,

    생명의 환호가 함께 날아든다.

    낮은 곳에서 피어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주어진 자리를 기쁨으로 채워갈 줄 아는 민들레처럼, 우리네 삶도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찐빵 6개와 10살 소녀

    엄마는 내게 찐빵이 든 투박한 봉지를 내밀며 말씀하셨다. “이거 니 아버지 갖다 드리고 오너라.” 봉지를 받아든 순간,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하고 따끈한 찐빵 냄새에 나는 저절로 군침을 삼켰다.

    우리 집 바로 앞에는 언제나 뜨끈한 찐빵을 쪄내는 기순이네 빵집이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보리밥조차 귀하던 시절에 엄마는 단 한 번도 그 찐빵을 사주신 적이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골목을 가득 채우는 빵 냄새는 어린 내게 참기 힘든 고문과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매러 나간 아버지를 위해 엄마가 내 손에 찐빵 봉지를 쥐여주신 것이다. 나는 이 심부름을 하면 빵 몇 개는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하며 아버지가 계신 논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마침 쉬고 계신 아버지께 반가운 마음으로 찐빵 봉지를 펼쳐 놓았다. 시장하셨던지 아버지는 허겁지겁 빵을 드시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마지막 하나라도 내게 나눠주시길 간절히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마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듯 6개의 찐빵을 그 자리에서 거의 다 비워버리셨다.

    순간, 열 살짜리 어린 마음속에 서운함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나는 울음을 억지로 참았다. 새벽부터 논으로 나가 고된 노동을 견딘 아버지께 그 찐빵이 유일한 점심 식사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얼마나 고프셨으면 눈앞의 딸을 보지 못하셨을까. 아버지 역시 마음속으로는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으로 울었다. 아버지가 겪어내야 했던 고단한 삶의 무게와 궁핍함, 그리고 철없는 기대에 부풀었던 내 모습이 겹쳐져 마음이 쓰라렸다. 당시의 아이들은 부모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집안 사정을 다 알았다. 오히려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일찍 철이 들어, 먹고 싶은 것도 스스로 포기하며 자라났다.

    어른이 된 지금, 찐빵을 볼 때마다 허겁지겁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아릿해진다. 철없던 딸의 눈치 없는 투정이 부끄럽고, 동시에 그 시대의 비정한 가난이 야속하다. 이제는 잊힐 때도 되었건만, 기억은 갈수록 생생해진다.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의 고단했던 뒷모습과, 그때 비로소 ‘어른’이 되어버린 어린 나의 아픈 성장이 주마등처럼 스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마음 아픈 음식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