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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윗을 다윗답게 만든 것

    구약 성경의 역사를 읽다 보면 수많은 왕의 흥망성쇠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던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물론이고, 선한 정치를 펼치다가도 노년에 교만해져 징계를 받았던 남유다의 여러 왕을 보며 인간의 연약함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왕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왕은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고,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실 만큼 다윗은 우리 신앙인이 평생 본받아야 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장점은 바로 철저하고 정직한 회개였습니다.

    다윗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는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른 왕들과 달랐던 점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결코 변명하거나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왕의 권위와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밤마다 침상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만을 구했던 그 겸손함이 바로 다윗을 가장 다윗답게 만든 최고의 장점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신뢰했던 사람입니다.

    청소년 시절 골리앗 앞에서도, 사울 왕에게 억울하게 쫓기던 긴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원수를 스스로 갚지 않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늘 하나님께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 물으며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다윗이 위대했던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넘어졌을 때 주님 앞으로 즉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는 겸손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 다람쥐가 잃어버린 도토리

    가을 숲을 걷다 보면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부지런히 주워 나르는 다람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작은 몸으로 겨울 양식을 마련하느라 바쁜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한참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람쥐는 모아 온 도토리를 땅속 곳곳에 숨겨 둡니다.

    겨울이 오면 하나씩 찾아 먹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다람쥐가 묻어 둔 도토리를 모두 찾아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어디에 묻어 두었는지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잊어버림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땅속에 남겨진 도토리 하나가 싹을 틔우고, 작은 나무가 되고, 세월이 흘러 또 한 그루의 도토리나무가 됩니다.

    다람쥐에게는 잊어버린 양식 하나였을 뿐인데, 숲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다람쥐는 겨울을 준비한다고 도토리를 숨겼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행동을 통해 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내가 한 작은 일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애써 놓고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다람쥐가 잊어버린 도토리가 숲을 이루듯,

    우리의 작은 수고 하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숲속의 다람쥐를 보며 생각합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작은 도토리 하나가

    나무가 되고,

    숲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숲이 시작된 순간을 알지 못합니다.

  • 도토리묵 한 모에 담긴 어머니의 침묵

    입이 출출해질 무렵, 고요한 동네를 깨우는 정겨운 외침이 들려온다.

    “도토리 묵 사이소~”

    신문을 보던 아버지, 바느질하던 어머니.

    성미 급한 큰언니가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엄마, 우리 묵 사 먹자.”

    엄마는 말이 없다. 그저 애꿎은 떨어진 양말을 동그란 전구 위에 씌우고 바늘을 부지런히 놀릴 뿐이다.

    우리 7남매의 시선은 엄마와 언니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60년대의 가난은 묵 한 모 사 먹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우리조차 본능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엄마의 묵묵한 침묵 속에 아이들은 침만 꼴깍 삼킨다. 신문을 보던 아버지도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신다.

    학교 월사금조차 내기 버거웠던 형편에, 도토리묵이라니. 기대에 찼던 아이들의 눈망울은 이내 실망에 젖어, 빈 뱃속을 달래며 잠자리로 숨어들었다.

    요즘 산짐승들이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뉴스를 본다.

    왜일까. 숲에 먹이가 없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본래 산짐승들의 귀한 식량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마저도 욕심내어 가져와 버렸다.

    사람들은 제 먹거리도 모자라 동물의 양식까지 빼앗았고, 갈 곳 잃은 짐승들은 결국 사람의 거처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다.

    예전에는 가난해서 도토리묵을 먹지 못했지만, 이제는 동물의 먹이를 뺏고 싶지 않아 묵을 멀리한다.

    자연은 귀하다. 동물들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살아야 인간도 살아갈 길이 열린다. 사람의 편리를 위해 산을 깎아 도로를 내면서, 산짐승들의 길이 사라졌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먹이도, 자연도, 공존의 가치도 무너지고 있다.

    한도 끝도 없는 인간의 욕심은 대체 어디서 멈출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가난해서 도토리묵을 먹지 못했다.

    이제는 동물의 먹이를 빼앗고 싶지 않아 스스로 묵을 멀리한다.

    세월은 흘렀지만,

    사람의 욕심은 더 커진 것만 같다.

    오늘 밤,

    묵묵히 양말을 꿰매시던 어머니의 손끝과

    먹이를 찾아 산을 내려오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자꾸만 내 마음속에서 하나로 겹쳐진다.

  • 높은 산꼭대기 소나무의 의연한 자태처럼

    흙 한 줌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저 높고 거친 바위산 꼭대기,
    하늘과 맞닿은 척박한 절벽 끝에
    의연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바라봅니다.

    시원하게 물 한 모금 받아 마실 수도 없는
    모진 환경 속에서도
    메마른 가뭄과 매서운 칼바람을 견디며
    어찌 저토록 사시사철 푸르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가지와 푸른 잎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 할지라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온 힘을 다해 대지를 붙들고 있는
    그 깊은 뿌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득 그 소나무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세상이라는 척박한 환경 한가운데서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메마른 가뭄 같은 날이 찾아오고,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앞으로 남은 길을 바라보며
    ‘내가 이 거친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 소나무를 바라보며 깨닫습니다.

    삶의 환경이 아무리 메마르고 거칠지라도
    내 영혼의 뿌리를 주님의 말씀에 깊이 내리고 있다면
    나는 다시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나무를 붙들고 있듯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믿음의 뿌리가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 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뿌리가 깊어질수록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고,
    긴 가뭄이 찾아와도
    다시 푸른 잎을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도 저 소나무처럼 살게 하소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사람들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어떤 계절을 지나더라도
    제게 맡겨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게 하소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푸른 가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저 나무처럼
    저의 남은 생애도 주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기쁠 때나 힘겨울 때나,
    푸른 계절이나 메마른 계절이나
    한결같이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제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깊은 감사의 예배를
    주님께 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 빈 의자에 남겨진 온도

    양산 들녘의 노을이 아늑하게 물들어가는 창가에
    주인 잃은 빈 의자 하나가 하루 종일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그저 평범한 의자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자꾸만 그곳으로 향합니다.

    한때는 그 자리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온기가 머물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는 참 이상합니다.
    주인은 떠났는데도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겨진 사람의 마음속에 그 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남겨 놓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에는
    그 존재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 잘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매일 마주 보고, 함께 밥을 먹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평범한 날들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차지했던 자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깊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나는 가끔 이 빈 의자를 오래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그저 쓸쓸하고 허전한 자리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빈자리는 어쩌면 슬픔의 흔적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한 사람이 내 삶에 머물렀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며 함께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을 말없이 증명해 주는 자리가 바로 이 빈 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창가의 의자를 바라보며
    나는 떠난 사람의 부재만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가 내 곁에 있었던 날들을 생각합니다.
    함께 웃었던 날들, 함께 걷던 날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가장 소중했던 평범한 날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아직도 그리움은 있습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사랑했던 사람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리움 속에서도 나는 믿습니다.

    우리의 이별이 영원한 끝은 아니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다는 것을.

    그날에는 더 이상 빈 의자를 바라보며 눈물짓지 않아도 되겠지요.

    다시 마주 앉아
    “참 오래 기다렸어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창가에서
    남편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를 먼저 보내주신 하나님께
    조용히, 오래도록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함께했던 그 시간을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연못 속 잉어의 자태와 하나님의 시선

    고요한 연못 안, 맑은 물결을 가르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잉어 떼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 연못가 둘레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신기한 듯 허리를 굽히고 저마다의 깊은 눈빛으로 잉어들의 몸짓에 온 이목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마다 각자의 처한 형편이 다르고 머릿속에 품은 복잡한 생각들이 다 다르겠지요.

    누군가는 삶의 지친 무게를 달래려 멍하니 물결을 바라볼 것이고, 또 누군가는 내일의 초조한 걱정을 안고 그 연못가를 서성이고 있을 것입니다.

    문득 유유자적 물 속을 거니는 저 잉어들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줄기 묘한 영적 의문이 피어오릅니다.

    저 잉어들은 지금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찰싹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더 나아가, 자신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거나 미소를 짓는 저 수많은 사람의 숨겨진 마음과 삶의 애달픈 사연들을, 저 작은 피조물들이 단 한 순간이라도 헤아리며 헤엄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저 잉어들은 그저 물속의 세상이 전부인 양, 바깥 세상의 거대한 시선과 마음의 주파수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의연하게 제 자태만을 뽐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연못가 소동을 뒤로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묵상해 보니, 저 연못 속 잉어의 모습이 바로 세상이라는 작은 연못에 갇혀 살아가는 연약한 나의 영혼과 너무나 똑닮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내 눈앞에 놓인 삶의 물결을 헤엄치며, 당장의 아픈 허리와 건강 걱정, 글방의 기계 자물쇠 소동에 마음을 빼앗겨 동동거리며 살아갑니다.

    마치 나 혼자 외롭게 이 거친 인생의 연못을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초조해하곤 하지요.

    그러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늘 보좌 위에서는 나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내 삶의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온 이목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계십니다.

    딸아, 네가 아파서 평상에 누워 눈물 흘릴 때도, 친구들과 즐겁게 통화하며 활짝 웃을 때도, 나는 늘 연못가에서 너를 가장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거대하고 웅장한 사랑의 부피와 애틋한 본심을 다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내 작은 생각 주머니 속에 갇혀 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잉어는 구경꾼의 마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말씀의 반석 위에 뿌리를 내린 성도는, 나를 바라보시는 창조주의 그 눈물겨운 사랑의 마음을 주파수처럼 찰싹 알아채는 신령한 지혜를 가졌으면 합니다.

    오늘도 세상이라는 작은 연못 속에서 오직 하늘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가장 의연하고 당당한 믿음의 자태를 뽐내는 양산 들녘의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조용히 눈물로 결단해 봅니다.

  • 선선한 솔바람에 자리를 양보한 더위처럼

    그토록 오랜 시간 온 지상을 뜨겁게 달구며 기승을 부리던 거친 무더위도, 이제는 긴 버티기에 지쳤는지 새벽녘 찾아온 선선한 솔바람 앞에 조용히 제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 모양입니다.

    지나간 계절 내내 뜨거운 뙤약볕은 수많은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고, 세상의 푸른 청춘과 들녘마저 모조리 집어삼킬 듯 사납게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정하고 매서운 한여름의 폭염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 또한 반드시 지나가리라.”


    그 믿음 하나를 품고 견디다 보면, 끝날 것 같지 않던 계절도 마침내 제때가 되어 물러갑니다.

    문득 양산 들녘의 툇마루에 앉아 이마를 부드럽게 스치는 고마운 바람을 맞으며, 내 삶을 뜨겁게 달구었던 시련의 계절들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숨만 쉬어도 뼈마디가 끊어질 듯 찾아왔던 벼락같은 격통도 있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창가의 빈 의자를 바라보며, 말없이 삼켜야 했던 외롭고 먹먹한 눈물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모든 아픔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메마른 땅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긴 가뭄처럼, 앞날은 막막했고 마음은 초조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바위산 꼭대기의 소나무처럼 말씀의 반석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신령한 가을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눈물로 뿌린 씨앗은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게 하실 것이다.”

    그 믿음을 가슴 깊이 품고 하루하루를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는 내 가난한 영혼의 마당 한가운데로 성령님의 선선한 은혜의 바람을 불어 보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던 아픔은 조금씩 가라앉았고, 뜨겁게 타오르던 눈물의 자리에는 다시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돌이켜보니 알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지독한 시련의 계절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의 법도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한없이 길어 보이던 여름도 반드시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우리의 고난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씨앗을 뿌리며 믿음으로 견뎌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지나간 폭염을 바라보며 오히려 주님을 찬양합니다.

    뜨거운 계절을 견디게 하셨고, 마침내 선선한 바람을 보내주셨으며, 눈물의 시간을 지나 눈부신 가을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양산의 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 남은 생애의 모든 계절을 주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며,
    지나온 모든 날에 감사하고 다가올 모든 날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가장 높고 당당한 감사의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 시골의 밤은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입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골의 밤은 결코 적막하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나서면 낮 동안 숨어 있던 풀벌레들이 저마다 맑은 소리를 내며 밤공기를 가득 채웁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이어지는 작은 생명들의 합창은 오히려 고요한 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위로 나뭇잎 사이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밤바람이 조용히 화음을 보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나무와 풀을 살며시 흔들며, 귀로만 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도시에서의 적막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라면,
    시골의 적막은 생명이 숨 쉬는 소리로 가득한 고요입니다.

    가만히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마음도 그 고요에 물들어 갑니다.

    낮 동안 복잡했던 생각들이 하나둘 잦아들고, 조급했던 마음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깨닫습니다.

    시골의 밤은 단순히 조용한 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름다운 예배당이구나.

    천장은 별빛이 덮어 주고,
    벽은 짙은 어둠이 감싸고,
    풀벌레의 노랫소리는 찬양이 되며,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밤바람은 조용한 기도가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화려한 성전보다 넓고,
    어떤 건물보다 높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엄한 예배당입니다.

    그곳에서는 굳이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작은 생명들의 숨결과 바람의 속삭임을 통해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시골의 밤이 좋습니다.

    사람이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당신의 아름다운 찬양을 들려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도 잠시 문을 열고 귀를 기울여 봅니다.

    풀벌레 소리 사이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사이로,
    말없이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봅니다.

  • 바로의 조롱 너머에 보이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본심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번역된 문장만으로는 도무지 맥락이 잡히지 않아 잠시 멈춰 서게 되는 구절을 만납니다. 출애굽기 10장 10절에서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말도 그런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을 섬기게 해 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비웃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까지 조롱하는 듯한 말을 내뱉습니다.

    처음 이 말씀을 읽으면 그 표현이 다소 낯설고 뜻이 쉽게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바로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면, 이 말 속에는 단순한 거절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오만과 이스라엘을 향한 잔인한 조롱이 담겨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1. 번역의 간극 너머, 그 시대를 엿보다


    성경은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언어 감각만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한 구절을 읽을 때에는 단순히 문장 하나만 떼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건네졌는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권력과 힘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실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사람의 조롱이나 거절 때문에 중단되지 않습니다.

    2. 성경 읽기, 지식이 아닌 ‘본심’을 만나는 시간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고대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일까요. 어려운 문장의 뜻을 풀어내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복잡한 문장들 사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세상은 때때로 바로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너를 도우실 수 있겠느냐?”

    어려움이 길어지면 우리 마음속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올라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실까?’
    ‘왜 하나님은 아직도 이 일을 허락하고 계실까?’
    ‘이 길이 정말 맞는 걸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눈앞의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지 말라고.

    바로의 조롱이 끝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눈앞에 놓인 난관도 결코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아닙니다.

    3. 오늘, 우리 삶의 기준이 되는 말씀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은 복잡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목소리는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옳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저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적어도 내가 어느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는 조금씩 분명해집니다.

    무엇이 참인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를 말씀 안에서 다시 묻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경을 펼칩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소리에 흔들리는 대신,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진리 위에 내 삶을 조금씩 세워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생각
    말씀 한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는 일은 어쩌면 보물찾기와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뜻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오래 바라보고,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고, 그 말씀을 오늘의 내 삶에 비추어 보면 어느 순간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의미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로의 조롱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으려 했어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세상의 조롱처럼 느껴지는 일이나,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난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바라본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조금 더 알아가며,
    눈앞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든든히 붙들어 주어,
    어떤 순간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우리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 잡초 틈에 피어난 작은 제비꽃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려고 잠시 앞마당으로 나섰습니다.

    투박하고 거친 잡초들이 빽빽하게 자라난 풀숲 한가운데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무성한 풀잎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도 홀로 영롱한 보랏빛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작은 제비꽃 한 포기였습니다.

    장미처럼 화려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백합처럼 고고한 자태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가녀린 꽃.

    그저 이름 모를 풀숲 한구석에서 조용히 피어나 있을 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무심한 발길에 채이고 밟히면, 원망의 소리 한마디 내지 못한 채 짓눌리고 또 짓눌리다가 흙 속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비꽃은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보랏빛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한참을 그 작은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화려한 세상의 조명도, 높은 자리를 탐할 이유도 없이 살아온 세월.

    나는 어느새 이 호젓한 시골 들녘의 자연을 바라보며 눈물이 많아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길을 걸어갈 때, 때로는 나 자신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때, 주님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건네시는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딸아, 낙심하지 마라.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지 않아도, 거친 환경의 발길에 네 마음이 짓밟히는 것 같은 날이 와도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잡초 틈에 숨어 피어난 저 작은 제비꽃을 내가 알고 있듯이, 너의 작은 기도와 눈물도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단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화려한 꽃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들꽃 하나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작은 생명도 당신의 손길 안에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저 작은 제비꽃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시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따뜻해집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피어나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생명을 노래하는 작은 제비꽃.

    나는 그 작은 꽃에게서 오히려 큰 믿음을 배웁니다.

    사람들의 박수보다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고,
    화려함보다 순종을 선택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삶.

    나의 남은 날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만 알아주시면 감사하고,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끝까지 피어나는 사람.

    오늘도 마당의 작은 제비꽃을 바라보며,
    내 남은 생애도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조용하지만 아름답게 피어나는 예배자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고개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