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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초 틈에 피어난 작은 제비꽃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려고 잠시 앞마당으로 나섰습니다.

    투박하고 거친 잡초들이 빽빽하게 자라난 풀숲 한가운데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무성한 풀잎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도 홀로 영롱한 보랏빛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작은 제비꽃 한 포기였습니다.

    장미처럼 화려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백합처럼 고고한 자태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가녀린 꽃.

    그저 이름 모를 풀숲 한구석에서 조용히 피어나 있을 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무심한 발길에 채이고 밟히면, 원망의 소리 한마디 내지 못한 채 짓눌리고 또 짓눌리다가 흙 속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비꽃은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보랏빛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한참을 그 작은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화려한 세상의 조명도, 높은 자리를 탐할 이유도 없이 살아온 세월.

    나는 어느새 이 호젓한 시골 들녘의 자연을 바라보며 눈물이 많아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길을 걸어갈 때, 때로는 나 자신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때, 주님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건네시는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딸아, 낙심하지 마라.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지 않아도, 거친 환경의 발길에 네 마음이 짓밟히는 것 같은 날이 와도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잡초 틈에 숨어 피어난 저 작은 제비꽃을 내가 알고 있듯이, 너의 작은 기도와 눈물도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단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화려한 꽃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들꽃 하나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작은 생명도 당신의 손길 안에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저 작은 제비꽃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시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따뜻해집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피어나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생명을 노래하는 작은 제비꽃.

    나는 그 작은 꽃에게서 오히려 큰 믿음을 배웁니다.

    사람들의 박수보다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고,
    화려함보다 순종을 선택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삶.

    나의 남은 날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만 알아주시면 감사하고,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끝까지 피어나는 사람.

    오늘도 마당의 작은 제비꽃을 바라보며,
    내 남은 생애도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조용하지만 아름답게 피어나는 예배자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고개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 십팔 년을 함께 걸었던 작은 천사에게

    불과 두 달 전, 무려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 삶의 가장 가까운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던 사랑하는 반려견이 마지막 숨을 내려놓고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18년이라는 시간은 그 작은 생명에게는 한평생이었고, 내게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이는 내 삶의 기쁨과 외로움, 웃음과 눈물을 말없이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계절이 수없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늘 한결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텅 빈 마당에 남아 있는 작은 흔적
    아이가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내 마음과 발걸음은 아직도 아이가 마지막 숨을 쉬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습니다.

    현관문 밖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온몸으로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주던 모습,
    지친 하루 끝에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작은 체온을 내어주던 따뜻함,
    세상 누구보다 나를 바라보던 맑은 눈빛….

    매일 아침 밥그릇을 챙겨주고, 산책을 나가기 위해 줄을 준비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평범한 일상이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들이었는데, 아이가 떠나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뒤늦게 깨닫습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감사의 자리로
    요즘도 양산 들녘 길을 홀로 걷다가 다정한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아이와 조금이라도 닮은 작은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 한쪽이 먹먹해집니다.

    길가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다가도, 함께 걷던 길과 함께 맞았던 바람과 평범했던 하루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슬픔의 모양도 조금씩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18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존재를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 아이는 내 삶의 한 부분이었고,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소중한 사랑의 시간이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18년의 선물
    그래서 이제는 슬픔만 붙들고 있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셨던 18년의 시간을 감사로 돌아보려 합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짧고 갑작스러운 이별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 작은 생명과 무려 18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내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마음을 전했고,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 그저 곁에 있어 주었으며,
    내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 작은 생명을 통해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물 속에 남은 감사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하지만 이제 그 눈물에는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년 동안 아이와 함께 웃었던 날들,
    함께 걸었던 길,
    마주 보며 나누었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한 감사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아이가 떠난 것이 너무 슬프지만,
    그 아이가 내 곁에 18년이나 머물러 주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얘야, 네가 내 곁에 와 주어서 참 고마웠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울지 않고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습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작은 사랑
    우리가 이 땅에서 진심으로 나눈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비록 아이의 모습은 더 이상 내 눈앞에 없지만, 함께했던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 살아 있습니다.

    텅 빈 마당을 바라볼 때면 아이가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고,
    창가의 익숙한 자리를 바라보면 그곳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이는 떠났지만 18년 동안 내게 주었던 사랑까지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때로는 눈물이 되고 때로는 따뜻한 미소가 되어 나와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도 아이가 누워 잠들던 자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18년 동안 내 곁에 머물러 주었던 작은 생명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통해 제게 사랑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질서

    성경의 첫 페이지를 펼치다 보면 인간의 지식만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늘을 궁창으로 나누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정말 하늘 저 너머에 물이 있다는 뜻일까?”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품어 보았을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금 더 오래 묵상하다 보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1. 과학적 호기심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보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초의 지구를 둘러싼 수증기층이나 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혼돈 가운데 있던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를 찾아가는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탐구하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은
    ‘그 물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더 놀라운 사실은,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시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세우셨고,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셨으며,
    텅 빈 세상에 생명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2. 혼돈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질서


    우리의 삶도 때로는 아무런 질서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첫 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처음부터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나하나 질서를 세워 가셨다는 것입니다.

    궁창을 세우시고 물을 나누신 창조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 가운데 경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마련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내 눈에는 아직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계실지 모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평범하게 숨을 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작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해 보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3.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신뢰할 수 있는 이유


    현대 과학은 우주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간다 해도 이 거대한 우주의 모든 신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내 삶에 찾아온 혼돈도 그렇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내게 이런 시간이 허락되었는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삶의 퍼즐 조각들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에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내 작은 삶을 모르고 계실 리는 없습니다.

    내가 지금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길을 준비하시고,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삶의 자리를 정돈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도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삶의 조각들 앞에서도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평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지금은 혼돈처럼 보이는 시간이
    훗날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세워 가시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은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니까요.

    궁창을 세우시고 혼돈 가운데 질서를 이루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삶의 작은 자리까지 살피고 계심을 믿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내 삶도
    그분의 손 안에서는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져 가고 있음을 믿으며,
    오늘도 조용히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렵니다.

  • 사랑의 달콤한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열왕기상 13장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묵직해집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두 선지자의 슬픈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상숭배로 가득했던 벧엘의 제단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젊은 선지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곳으로 갔고, 맡겨진 말씀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담대했던 하나님의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뜻밖의 시험을 만납니다.

    바로 동료 선지자였던 한 늙은 선지자의 말이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짓말하며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가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셨다.”

    젊은 선지자는 처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 길을 걸으며 지쳤던 그는 결국 그 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달콤한 말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말은 언제나 험악하거나 거칠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때로는 믿음직해 보이는 사람의 입술을 통해,
    정겨운 위로나 호의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겠지.”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니까 틀림없겠지.”

    “이 정도는 해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들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앞세우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의 비극은 단순히 거짓말에 속았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신뢰했던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큰일을 해냈다고 해서 언제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어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의 분별까지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극의 자리에서 울려 나오는 한 노인의 통곡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 가슴 아픈 장면이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행동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가에 놓인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의 묘실에 장사하고, 그를 향해 이렇게 슬퍼합니다.

    “오호라 내 형제여.”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뼈를 그 하나님의 사람 곁에 장사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늙은 선지자의 마음속에도 깊은 회한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거짓된 말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양심은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니까 틀림없겠지.”

    “이 정도는 해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들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앞세우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의 비극은 단순히 거짓말에 속았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신뢰했던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큰일을 해냈다고 해서 언제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어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의 분별까지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극의 자리에서 울려 나오는 한 노인의 통곡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 가슴 아픈 장면이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행동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가에 놓인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의 묘실에 장사하고, 그를 향해 이렇게 슬퍼합니다.

    “오호라 내 형제여.”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뼈를 그 하나님의 사람 곁에 장사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늙은 선지자의 마음속에도 깊은 회한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거짓된 말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양심은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그의 눈물은 단순히 죽은 선지자를 향한 슬픔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뒤늦게 무너지는 한 사람의 아픈 마음도 그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양심은 때로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말에 흔들릴 때도 있고,
    내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미룰 때도 있습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찾아오는 양심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 아픔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죄를 짓고도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생각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을 내 편의대로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사람의 달콤한 말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하소서.
    세상의 그럴듯한 목소리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혹여 내가 길을 잃었을 때에는 양심의 작은 울림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길에서 즉시 돌이킬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오늘도 수많은 목소리가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 모든 소리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가장 먼저 알아듣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오래된 장농

    집 안 한쪽에 묵묵히 서 있던 장농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옷과 이불을 넣어 두는 커다란 가구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 그 장농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시간과 어머니의 사랑을 말없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장농 문을 열 때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오던 나무 냄새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순간 코끝을 스치던 그 냄새는 이상하리만큼 포근했습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들리던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마저 어린 시절에는 정겨운 음악처럼 들렸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이면 어머니는 장농 깊숙한 곳에서 두툼한 이불을 꺼내셨습니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을 마당에 펼쳐 놓고 툭툭 털어내시던 모습.

    차곡차곡 접혀 있던 이불 사이에는 비누 향기와 햇살 냄새가 스며 있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장농을 참 아끼셨습니다.

    새것으로 쉽게 바꾸기보다 오래된 것을 소중히 사용하셨고, 작은 흠집 하나에도 손수 닦고 또 닦으셨습니다.

    반질반질 윤이 나던 손잡이는 수십 년 동안 어머니의 손길이 머물렀다는 증거였습니다.

    그 손잡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끼며 살아오셨던 어머니의 검소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장농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옷과 이불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장농 속에는 계절마다 갈아입던 옷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자식이 감기에 걸릴까 미리 꺼내 두셨던 겨울 이불.

    명절이면 입히려고 곱게 접어 두셨던 옷.

    언젠가 쓸 날이 있을 거라며 버리지 않고 정성껏 간직해 두셨던 작은 천 조각 하나까지.

    그 모든 것에는 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이 먼저 들어 있었습니다.

    장농은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을 차곡차곡 접어 두는 곳이었습니다.

    요즘 집에는 세련된 붙박이장이 들어서고, 오래된 장농은 하나둘 사라져 갑니다.

    생활은 훨씬 편리해졌지만, 문을 열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던 나무 냄새도, 삐걱거리던 경첩 소리도, 그곳에 머물던 어머니의 손길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만 같습니다.

    가끔은 그 오래된 장농 하나가 몹시 그리워집니다.

    장농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그리운 것은 아닙니다.

    그 문을 열면 언제나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던 어머니의 마음이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입니다.

    세월은 흘러 장농은 낡아 갔지만,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사랑만은 조금도 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랑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장농 안에 정성껏 넣어 두셨던 것은 이불도, 옷도, 천 조각도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을 향한 사랑과 염려,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오래된 장농 하나가 있습니다.

    문을 열 때마다 나무 냄새 대신 어머니의 사랑이 조용히 흘러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장농 하나가.

  • 나를 영글게 하시는 하나님의 고마운 햇살

    정수리를 세차게 내리쬐는 뙤약볕이
    살갗을 파고들고 숨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잠시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피하면서도
    ‘이 지독한 더위는 언제쯤 물러가려나’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들녘을 바라봅니다.

    내가 땀 흘려 심어놓은 농작물들이
    이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아무 말 없이 제 속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이 볕이
    저들에게는 생명을 키우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잎과 줄기만 무성해 보이지만
    때가 되면 저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견뎌낸 시간들이
    탐스러운 열매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그 순간에는 너무 뜨겁고 버거워서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때의 눈물과 인내가
    오히려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농작물이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속을 채워가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힘겨운 계절을 통해
    우리의 영혼도 조금씩 영글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을 지치게 하는 뜨거운 볕은 잠시뿐이지만,
    그 볕이 지나간 자리에 맺힐 가을의 풍성한 열매는
    우리의 삶을 오래도록 기쁘고 배부르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뜨거운 햇살을 바라보며
    조금 다른 마음을 가져봅니다.

    ‘주님, 이것도 나를 영글게 하시는 시간이겠지요.’

    지금 당장은 힘들고 뜨거워도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삶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열매가 맺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타오르는 들녘 앞에 조용히 서서
    나를 영글게 하시는 하나님의 고마운 햇살을 바라보며
    고개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 들녁에서 드리는 눈물겨운 예배

    우리는 흔히 화려한 조명이 켜진 

    높고 웅장한 예배당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릴 때만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 여기곤 하지요.

    그러나 오늘,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창가에 앉아

    투박한 명자나무 몸통에 피어난 명자꽃 세 송이와

    단단한 아스팔트를 쩍 갈라내고 솟아오른 

    연약한 들풀 한 포기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 작은 피조물들의 숨소리 속에서

    나는 예배당의 그 어떤 설교보다 

    더 웅장하고 세밀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마주합니다.

    아기 싹을 위해 자신의 두꺼운 살을 쩍 찢어 

    숨구멍을 내어준 고목의 양보 속에서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서 온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눈물겨운 보혈의 희생을 봅니다.

    손가락으로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한 어린 들풀이 어떻게 단단한 돌바닥을 뚫었을까요?

    그것은 거대한 장벽 밑에서 숨겨진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찾아내어 새싹의 세포 속으로 묵직한 물방울을 가득 채워주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심한 손길 덕분이었습니다.

    내 눈에서 마르지 않고 흐르는 이 감격의 눈물은

    비정하고 삭막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살아서 숨 쉬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가장 순결한 고백입니다.

    일흔넷의 지고 지난했던 인생의 거친 껍질 속에서도

    끝까지 나를 눈동자처럼 아끼고 기르시는 

    주님의 세밀한 사랑이 들녘 가득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살아 숨 쉬는 주님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타오르는 자연 앞에서 

    가장 깊고 신령한 삶의 예배를 올려 드립니다.

    “주님, 교회의 문턱을 넘어 

    이 거대한 자연 성전 속에서 일하시는 

    당신의 살아있는 손길에 날마다 감격하게 하소서.

    들녘의 들풀 하나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내 남은 생애도 오직 주님 가신 길만을 노래하는 

    작고 아름다운 들녘의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

  • 껍질을 뚫고 나온 작은 생명

    거칠고 두꺼운 나무껍질.

    세상의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울타리이지만,
    그 안에서 막 움트려는 어린 생명에게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 캄캄한 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작은 새싹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 몸보다 수백 배는 더 단단한 껍질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끝끝내
    연둣빛 고개를 밀어 올립니다.

    도대체 그 작은 몸 안에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 것일까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빛을 향해 나아가고,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기어코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미는 작은 생명.

    아마도 그 힘은
    세상의 어떤 장벽보다 강한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생명의 뜨거운 본능일 것입니다.

    거친 벽을 뚫고 세상 밖으로
    첫인사를 건네는 저 작은 싹을 바라보며
    오늘도 삶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었던 나를 조용히 돌아봅니다.

    나에게도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애써도 벽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지던 날들.

    그러나 작은 새싹은
    자신 앞에 놓인 벽의 크기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빛이 있는 곳을 향해
    자신의 작은 힘을 다해 한 걸음씩 밀어 올렸습니다.

    어쩌면 믿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모든 길이 보이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빛이 있는 방향을 믿으며 한 걸음 내딛는 것.

    가장 두려운 순간에도
    빛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는 것.

    어쩌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련도
    영원히 우리를 가두어둘 벽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 넓은 세상으로 밀어 올리는
    단단한 껍질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 조금 힘들다고 해서
    내 삶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안에도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작은 생명은 반드시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껍질을 밀어내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생명은 때로 가장 어두운 곳에서 자라고,
    가장 단단한 벽을 뚫고 나올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오늘도 빛을 향해
    조용히 한 걸음 내딛어 봅니다. 🌱

  • 엄마의 곰탕, 평생을 우려낸 사랑

    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에는 하루 종일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커다란 무쇠솥 안에서 닭이든 소뼈든 묵묵히 끓고 있으면, 집 안 가득 따뜻한 냄새가 번져 나갔다.

    어머니는 국물이 넘칠까 수시로 뚜껑을 열어 보셨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맛을 보시며 조용히 불을 조절하셨다.

    철없던 그때는 미처 몰랐다. 진한 곰탕은 오래 끓여야만 비로소 제맛이 난다는 것을.

    더 몰랐던 것은, 어머니의 사랑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우리 삶 속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곰탕은 한 번 끓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센 불로만 거칠게 끓이면 국물은 탁해지고, 은은한 약한 불에서 오래 기다려야 맑고 깊은 맛이 우러난다.

    어머니의 사랑이 딱 그랬다. 큰소리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조용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키며 깊어져 갔다.

    어머니는 늘 좋은 고기는 자식들 그릇에 먼저 넉넉히 담아 주셨다.

    정작 당신은 고기 한 점 없는 국물에 밥을 말아 드시면서도,
    “엄마는 이 뜨끈한 국물이 더 좋다.”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철이 들고서야 알았다. 고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식을 너무나 사랑해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부엌에 서서 곰탕을 끓여 본다. 신기하게도 몇 시간을 정성껏 끓여도 옛날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그 깊은 맛은 도무지 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머니의 국물 속에는 닭이나 소뼈만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향해 밤낮으로 흘린 땀방울과 평생의 기도가 함께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냄비 위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른다. 아지랑이 같은 그 김을 바라보다 문득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온다.

    나에게 곰탕은 그저 식탁 위에 올려지는 음식을 넘어, 평생을 뭉근하게 끓여 우리를 키워 내신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랑 그 자체였다.

  • 낡은 고무신에 남은 아버지의 발걸음

    창고 한구석에서 낡은 고무신 한 켤레를 발견했습니다.

    검은 고무는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윤기를 잃었고,
    발등에는 작은 상처와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오래되어 이제는 버려야 할 신발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한 켤레의 낡은 신발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신발은 비 오는 날에도 걸었을 것입니다.

    눈 내리는 추운 새벽에도 걸었을 것입니다.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 시장을 오가고,
    논두렁을 걷고,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골목길을 묵묵히 오갔을 것입니다.

    신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래 걸어 밑창이 닳고,
    발등에는 세월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닳아버린 밑창이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참 많이 걸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몰랐습니다.

    왜 아버지의 발이 그렇게 크고 거칠어 보였는지,
    왜 신발 밑창이 늘 그렇게 빨리 닳아버렸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가족의 삶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원래 그렇게 무거운 것이었나 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길을 걷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길을 만들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월은 아버지를 데려갔지만
    그분이 신었던 낡은 고무신은 아직도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네가 지금 걷는 길도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길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살아온 길도 가만히 돌아보게 됩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따뜻한 발자국 하나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내 앞만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도 그 낡은 고무신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아버지는 이미 떠나셨지만
    그분이 남긴 발자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낡은 고무신 한 켤레에 남겨진 수많은 걸음처럼,
    아버지의 사랑도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압니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은 발자국처럼
    오늘도 말없이
    우리 곁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