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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충망 너머의 손님, 창가에 찾아온 늠름한 황조롱이

    평화로운 오후, 창문 가까이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방충망 틀 위에 귀한 손님인 황조롱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쉬고 있는 녀석의 깃털 결마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조심스럽고 반가운 마음에 스마트폰을 들어 셔터를 누르는 순간, 황조롱이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이 마주쳤고,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라 힘찬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시골에 살다 보면 자연 속에서 인간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짐승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문득 창세기의 기록처럼, 인간의 죄로 인해 피조 세계의 조화가 깨어지고 서로를 두려워하게 된 세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경쟁과 생존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도 서로를 경계하며 높은 장벽을 쌓고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반면,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반려동물은 아무런 조건 없이 저를 믿고 따르며 무조건적인 수용과 신뢰를 가르쳐 줍니다.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갈 때 비로소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일서 4:18)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향한 경계의 빗장을 풀고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마당을 스쳐 간 황조롱이를 떠올리며,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 따뜻한 신뢰와 위로가 꽃피는 하루를 그려봅니다.

  • 트로이 목마: 기만과 방심이 초래한 역사적 비극

    이미지 설명: 고대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 아래, 거칠고 웅장하게 제작된 거대한 목마가 트로이 성문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목마의 나무 질감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주변에는 트로이 병사들과 시민들이 경이로움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벽 뒤로는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채가 위엄 있게 솟아 있으며,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곧 닥쳐올 비극을 암시하듯, 목마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트로이 목마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의 심리와 행동적 오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10년간 난공불락이었던 트로이 성을 하룻밤 만에 무너뜨린 이 계략은, 단순한 전쟁사를 넘어 방심이 불러오는 파멸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군은 ‘전쟁의 종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거대한 목마 안에 정예 병사를 숨겼고, 승리에 도취한 트로이인들은 이를 성안으로 들였습니다. 결국 모두가 잠든 밤, 목마 속에서 나온 병사들에 의해 트로이는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이 비극 속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세 가지 교훈을 짚어봅니다.

    첫째,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비판적 사고’입니다.

    트로이인들은 목마의 화려한 외형과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포장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만약 그들이 본질을 의심하고 내부를 점검했더라면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투자 제안, 디지털 정보, 각종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편리함에 눈이 멀어 그 이면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성에 위험을 들여놓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둘째, 성공의 순간에 찾아오는 ‘방심에 대한 경계’입니다.

    트로이의 함락은 그리스군의 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경계태세를 완전히 푼 트로이인들의 방심 때문이었습니다. 성문이 열리고 축배를 들던 그 순간이 가장 취약한 때였습니다. 인간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믿을 때 가장 쉽게 무너집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격언처럼, 일이 잘 풀릴수록 자만심을 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내면의 경계심이 필요합니다.

    셋째, 소수의 합리적 목소리를 경청하는 ‘열린 태도’입니다.

    당시 라오콘과 카산드라는 목마의 위험성을 강력히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승리감에 취한 집단은 이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핍박했습니다. 조직이 위기에 처하는 이유는 경고가 없어서가 아니라,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쓴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개방적 태도는 파멸을 막는 최후의 방어벽입니다.

    결론적으로, 트로이 목마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달콤한 기만은 언제나 아군으로 위장해 찾아오며, 이를 막아내는 유일한 무기는 끊임없는 성찰과 깨어있는 이성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트로이의 비극을 거울삼아 오늘 우리 삶 속의 목마를 식별해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안전과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보도블록 틈새의 사막, 과자 부스러기를 짊어진 서글픈 자화상

    보도블록 틈새는 태양의 열기가 이글거리는 거대한 사막 같았다. 그 무자비한 불볕 아래, 모래알보다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과자 부스러기를 짊어지고 위태로운 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휘청거렸고, 짐의 무게에 밀려 뒤로 미끄러지기 일쑤였지만, 녀석은 결코 그 거대한 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이런 풍경을 마주할 때면 교과서가 주입한 성실함과 부지런함의 표본이라는 뻔한 문장을 떠올린다. 땀 흘려 일하는 자의 고결함 같은 수식어를 붙여주며 감탄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비틀거리는 녀석을 지켜보며 문득 쓸쓸한 의문이 스쳤다. 남들이 다 쉴 만한 이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쉬지 않고 일만 해야 하는 저 삶은, 과연 찬양받아 마땅한 미덕일까, 아니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본능의 우리에 갇힌 기계적인 반복에 불과한 것일까.

    주어진 운명이라는 쳇바퀴를 원망할 줄도 모른 채, 오직 짊어진 짐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녀석의 뒷모습에서 어쩌면 치열하다 못해 애처로운 우리네 고단한 일상의 서글픈 자화상을 본 것만 같았다

  • 과거에 갇힌 우리에게 나비가 건네는 위로

    나비가 번데기였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게 날아다닙니다.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는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노란 날개를 가졌든,

    호랑나비의 화려한 무늬를 가졌든,

    하얀 날개를 가졌든,

    검은 날개를 가졌든,

    남과 비교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꽃을 찾아 날아갈 뿐입니다.

    한 송이 꽃에 오래 매달려 꽃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 꿀을 얻으면 미련 없이 다음 꽃으로 날아갑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다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오래 머뭅니다.

    자신을 아프게 했던 기억을 되풀이하며,

    상처를 다시 꺼내 보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아물기보다 오히려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작은 나비는 자신의 과거를 붙잡지 않는데,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시간에 스스로를 묶어 두곤 합니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연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을요.

    창조주께서 자연을 만드신 이유는 단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연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삶의 지혜를 배우게 하시려는 뜻도 담겨 있었음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예전에는 자연을 그냥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꽃은 그냥 꽃이었고,

    나비는 그저 나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연이 제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발견했니?”

    그 질문을 마주한 뒤부터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저는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 안에는

    창조주의 지혜와,

    삶을 다시 살아갈 용기,

    그리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진리가 조용히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 뜨거운 하늘을 가르는 날갯짓:쉼 없이 단련되는 삶의 은혜

    아침 창가에 서 있는데, 뜻밖의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뜰의 풀잎이나 나뭇가지가 아니라, 아득한 하늘 한가운데를 가르는 수많은 잠자리 떼였습니다.

    처음에는 눈높이가 낮아 아래로 날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3층이다 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잠자리들이 마치 바로 눈앞을 스치듯 날아다녔던 것입니다. 신기하고 궁금한 마음에 얼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마당에 내디딘 발걸음은 채 몇 초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은 마치 거대한 화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처럼 뜨거웠고,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폭염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잠시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저는 얼른 다시 시원한 실내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숨을 몰아쉬며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에도, 잠자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이글거리는 한낮의 뜨거운 하늘을 거침없이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폭염 속에서도 조바심 내거나 지친 기색 없이 저 높은 공기를 가르는 그들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문득,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아니, 잠자리는 더위도 안 타나?”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인간의 연약함과 대조적으로, 그 작은 생명은 가장 뜨겁고 치열한 태양 아래서 오히려 자신의 날개를 온전히 펼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생의 계절에 예고도 없이 뜨거운 폭염 같은 시련이 쏟아질 때, 우리는 왜 이토록 뜨거우냐고,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오느냐고 주저앉아 한숨을 짓곤 합니다. 피할 곳만 찾고, 이 더위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날개를 더욱 팽팽하게 펴고 하늘을 가르던 잠자리처럼, 우리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역시 가장 뜨겁고 힘겨운 그 시공간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피하고만 싶었던 그 뜨거운 삶의 자리야말로, 내 영혼이 더 넓은 하늘을 비상할 수 있도록 날갯짓을 단련시키는 은혜의 훈련장인 셈입니다.

    오늘도 3층 창가에서 마주한 작은 잠자리의 대담한 비행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뜨거움에 압도되어 주저앉기보다, 그 열기를 이겨내며 더 높이 날아오를 힘을 구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 제비 둥지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은혜

    아침이면 시골집 마당이 가장 먼저 활기차게 하루를 열어젖힙니다. 창문을 넓게 열면 여기저기서 청아하게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날아다니며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는 새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자연도 쉼 없이 부지런히 살아간다는 경이로운 생명의 질서를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마당 처마 밑에는 제비 한 쌍이 찾아와 다정하게 둥지를 틀었습니다. 며칠 전 부화한 네 마리의 어린 새끼들은 노란 주둥이를 하늘로 한껏 치켜들고 어미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먹이를 부리 가득 물고 돌아온 어미 제비는 제 몸이 지칠 법도 하건만, 잠시도 쉬지 않고 새끼들에게 공평하게 먹이를 나누어 주느라 분주합니다.

    1. 약한 자를 먼저 살피는 ‘위대한 모성’

    그런데 며칠 동안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조금 신비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제 눈에는 네 마리 새끼 모두 비슷해 보였는데, 어미 제비는 유독 한 마리에게만 먹이를 훨씬 더 자주, 정성껏 물어다 주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마음을 기울여 그 이유를 살핀 끝에, 저는 그 눈물겨운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어미 제비가 유독 정성을 쏟던 그 새끼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눈에 띄게 몸집이 작고 힘이 약했습니다. 어미는 둥지 안에서 목소리 크고 힘센 새끼가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경쟁하기 힘든 가장 연약한 새끼를 본능적으로 먼저 살피고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애틋한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대자연을 ‘적자생존’의 냉혹한 세계라고 말합니다. 냉혹한 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계에서 오직 강한 생명만이 선택받아 살아남는다는 관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처마 밑 작은 제비는 제게 전혀 다른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강한 자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둥지 구석에서 소외된 가장 약한 자를 먼저 돌아보고 품는 자비로운 마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2.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시선

    그 가슴 뭉클한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도 이와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시는 동안 언제나 가장 낮고 약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고치셨고,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또한,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한 양을 뒤로하고 길 잃은 소중한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험한 길을 마다치 않으셨던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냉정한 법칙은 언제나 능력 있고 화려한 자들을 주목하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파하는 사람을 눈동자처럼 먼저 품으시고 위로하십니다. 어미 제비가 연약한 새끼에게 먹이를 더 많이 나누어 주듯, 우리 하나님께서도 세상이 외면하는 그 한 사람에게 당신의 온기와 은혜를 더 깊이 쏟아부으십니다.

    3. 가정이라는 울타리, 그 사랑의 무게를 배웁니다

    저는 우리의 소중한 가정도 바로 이러한 제비의 모성애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똑같이 대하는 무미건조한 공평함이 아니라, 오늘 하루 유독 힘들어하는 가족을 더 따뜻하게 안아주고, 낙심한 이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해 주는 넉넉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세상이 아무리 차가운 광야 같을지라도 그 가정은 무엇보다 포근하고 따뜻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마당 한편 작은 제비 둥지를 바라보며 부모가 가져야 할 참된 사랑의 무게를 다시금 겸손히 배웁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소중한 그 한 영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한 아침입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토록 따뜻한 위로의 어미가 될 수 있기를, 나보다 더 약한 이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그 지극한 사랑의 섭리가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 24년째 거미와 전쟁

    시골로 이사 온 지 스물네 해가 넘었습니다.
    사람들은 시골이라 하면 맑은 공기와 새소리,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먼저 떠올립니다. 저 역시 그런 풍경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제게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거미였습니다.

    봄이 되면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여름이면 창문마다 거미줄을 칩니다. 아침에 깨끗이 걷어 내면 저녁에는 어느새 다시 집을 지어 놓습니다. 대문에도, 창틀에도, 마당 한쪽에도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시작된 거미와의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거미는 무섭습니다. 긴 다리를 보면 움찔하고, 얼굴 가까이에 거미줄이라도 닿으면 저도 모르게 손부터 휘젓습니다. “오늘은 기어이 다 치워 버리겠다.”며 빗자루를 들고 나서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다 치웠다고 생각하고 다음 날 아침 문을 열면, 거미는 이미 새 집을 완성해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몇 번을 치워야 하는 거야.’

    ‘얘들은 포기도 모르나.’

    그런데 어느 날, 빗자루를 든 채 한참 거미를 바라보다가 문득 제 마음을 멈추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거미줄을 걷어 내고, 거미는 하루 종일 다시 짓고 있구나.

    한 번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집이 무너지면 다시 짓고,

    또 무너지면 다시 짓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묵묵히 자기 일을 이어 갑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제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나는 기도의 응답이 조금 늦어지면 쉽게 낙심하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금세 힘이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생명은 집이 열 번 무너져도 열한 번째 집을 짓고 있습니다.

    거미는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제게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삶은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다시 시작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 거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창문에 거미줄이 보이면 빗자루부터 찾습니다.

    아마 내일도 거미줄을 걷어 낼 것이고, 거미는 또다시 집을 지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거미줄을 걷어 내면서도 가끔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 너는 오늘도 포기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저도 제 마음속에 무너진 집을 다시 지어 봅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고,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희망을 다시 시작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스물네 해 동안 제게 거미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일도 저는 거미줄을 걷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거미는 또다시 집을 지을 것입니다.

  • 낚시는 물고기만 낚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낚시터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노라면 세상의 소음은 잦아들고, 시간은 더디게 흐릅니다.

    찰랑이는 물결과 미동도 없는 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인생의 축소판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고기는 좀처럼 미끼를 물지 않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낚시터는 기다림만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마음과 싸우는 가장 조용한 장소인지도 모릅니다.

    물속의 고기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데, 정작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낚여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능 좋은 그물과도 같습니다.

    잊고 싶었던 오래전의 후회,

    누군가에게 들었던 상처의 말,

    사소한 실수들이 끊임없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조금만 더 참을걸.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우리는 그 미끼를 다시 물고, 과거의 통증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곤 합니다.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 가운데 크기가 작거나 목적과 다른 것은 미련 없이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냅니다.

    그것이 낚시의 기본 예의이자, 다음을 위한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의 그물에 걸린 것들 앞에서는 참 인색합니다.

    버려야 할 후회와 염려,

    놓아주어야 할 상처를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담아야 할 감사와 평안,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담을 공간은 점점 좁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는 내일은커녕 이미 지나간 어제까지 다시 낚아 올려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선물보다,

    이미 지나 어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제 모습이 문득 낚시터에 앉아 있는 제 모습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낚시를 하며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낚싯대는 물속에 드리우되,

    마음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

    무엇을 낚을지 제 욕심으로 결정하기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감사히 받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음의 그물을 비우는 일은,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붙잡으려는 고집을 내려놓는 일과도 같습니다.

    버려야 할 생각은 미련 없이 물속으로 돌려보내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사를,

    평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채워 보십시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분별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낚싯바늘 끝에는 고기 한 마리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후회 하나를 건져 올려 미련 없이 놓아줄 수 있었다면,

    그날의 낚시는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하루.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비우고,

    그 자리에 주님의 평안을 채워 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 정원 한쪽에는 자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마당의 자두나무

    그 자두는 유난히 맛이 좋아 한 번 맛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곤 했지요. 어느 해에는 무려 600개가 넘는 자두를 수확하기도 했습니다. 부부가 다 먹을 수도 없는 양이라 대부분은 이웃과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옆집 사람들이 수시로 들어와 자두를 따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너무 자연스럽게 따 가는 모습을 보니,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마음에 조금씩 불편함이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가 먹어 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마음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욕심이 머물던 자리

    ‘차라리 나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자두 몇 알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속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듬해에는 자두가 20개 남짓 열렸고, 그다음 해에는 겨우 서너 개가 달렸습니다. 결국 자두나무는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수명이 다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 나무는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비추어 주고 떠난 나무였습니다.

    자두나무가 남겨준 것

    그 일을 겪으며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묘합니다. 처음에는 나누던 사람이 어느새 계산하는 사람이 되고, 감사하던 사람이 어느새 불편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욕심은 처음부터 크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서운함 하나가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서 조금씩 사람을 바꾸어 갑니다.

    자두나무는 내게 맛있는 열매보다 더 귀한 것을 남겨 주었습니다. 바로 내 마음을 돌아보는 법이었습니다.

    이제는 자두나무가 없지만, 그 나무 앞에서 부끄러웠던 내 마음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세상의 기준이 모서리를 깎아낼 때:조각목에서 발견하는 위로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목공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최고급 원목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적이 있으실 겁니다. 결이 곧고 옹이가 없는 매끄러운 목재는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아 훌륭한 가구의 재료가 되죠. 반면, 거친 환경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뒤틀린 나무는 가공하기 까다로워 보통은 건축 자재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역사적·고고학적 문헌이나 성경 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시팀나무(아카시아 나무의 일종, 조각목)가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메마른 사막과 광야의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이 나무는 줄기가 뒤틀리고 온통 옹이투성이로 자라납니다. 눈길을 줄 만한 화려함이나 곧은 기품과는 거리가 멀죠.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과 전통을 담은 성경에서는 이 볼품없는 조각목이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공간인 성막의 뼈대와, 가장 거룩한 보물인 언약궤를 만드는 핵심 재료로 쓰였다고 전합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주목받지 못할 이 나무가 어떻게 가장 귀한 자리에 놓일 수 있었을까요?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들의 이야기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며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힙니다.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만 왜 이토록 모난 모습일까 자책하기도 하고,

    남들은 다 곧고 평탄하게 인생의 길을 닦아나가는 것 같은데, 내 삶에는 상처와 흉터라는 옹이만 가득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기준은 늘 ‘곧고 반듯한 나무’입니다. 흠집 하나 없는 매끄러운 스펙, 완벽하게 정돈된 일상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죠. 그래서 굽어지고 뒤틀린 우리의 상처는 감추어야 할 결점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조각목의 가치는 나무 그 자체의 완벽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듬어지고 입혀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가치

    조각목이 거룩한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과정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 나무가 원래부터 곧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숙련된 장인의 손길에 의해 다듬어지고 그 위에 순금이 덧입혀졌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튀어나온 옹이는 깎여 나가고, 뒤틀린 결은 장인의 도구에 의해 반듯하게 다듬어집니다. 그리고 그 위에 찬란한 순금이 입혀질 때, 비로소 내면의 볼품없음은 사라지고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귀중한 보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죠.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상처나 실패, 혹은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난 구석들은 어쩌면 완성이 아니라 다듬어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척도로는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그 굽어진 굴곡마다 깊은 이해와 연륜,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은혜가 덧입혀질 때 우리는 그 어떤 곧은 재목보다 더 깊고 단단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가장 아픈 곳에 가장 찬란한 빛이

    혹시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뒤틀려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남들은 다 평탄한 길을 가는 것 같은데 나만 홀로 광야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오시나요?

    그렇다면 어쩌면 당신은 지금 인생이라는 거대한 장인의 손길 아래에서, 가장 귀한 작품으로 빚어지고 있는 순간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옹이진 상처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아픔이 머문 자리에 더 단단한 결이 생기고, 언젠가 그 삶의 흔적 위에 따뜻하고 찬란한 빛이 입혀지는 날,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거친 광야에서 저마다의 옹이를 품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응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