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신앙 묵상

  • 헐값으로 팔린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봅니다

    매일 아침 고요함 속에서 시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차마 소리 내어 읽기조차 조심스러운 가슴 아픈 고백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최근 제 마음에 커다란 울림과 함께 눈물을 고이게 만든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도다.”
    (시편 44:12)

    고대 사회에서 노예를 사고팔던 모습을 떠올리면, ‘헐값으로 팔았다’는 표현에는 자신의 존재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비참함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딱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무 가치 없는 존재처럼 버려진 것만 같은 비참함과 찢어지는 아픔이 헐값으로 파셨다는 그 짧은 한 문장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만히 소리 내어 읊조리다 보니, 비단 백성들의 아픔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가슴 미어지는 눈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도다.”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갈 때, 부모는 매를 들며 자식보다 더 큰 울음을 속으로 삼킵니다. 자식을 때려서 이익을 얻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겨주며 징계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낮추시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런 기쁨도, 이익도 얻지 못하신 채 자식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아파하셨던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는 고백입니다.

    생각해 보면 왕의 자리에 앉아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다윗 역시, 인생의 노년에 뼈가 깎이는 듯한 질병과 자식의 반역이라는 혹독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시편에는 그런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던 다윗의 겸손한 고백들이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승리를 기념하는 기록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던 눈물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74세라는 인생의 사계절을 지나오며, 제 삶에도 때로는 세상의 거친 풍파에 밀려 내 존재가 참 초라하고 헐값처럼 느껴지던 외롭고 서글픈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내 감정이 요동치고 억울함이 밀려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 섞인 탄식을 뱉어내던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내가 아파하며 눈물 흘리던 그 모든 순간에, 주님은 멀리서 구경만 하신 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안고 내 곁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계셨음을 말입니다.

    오늘도 제 소박한 묵상 글을 읽어주시는 귀한 분들께 마음을 전합니다.

    혹시 지금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나 혼자만 외로이 고통받고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내가 흘리는 눈물 뒤에는 나를 결코 헐값으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나보다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이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주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오늘도 참된 평안을 누리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 원수를 사랑하라, 그 말씀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가장 지키기 힘든 주님의 말씀 중 하나는 단연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가빠오는 속상한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상대를 용서하려 애쓰지만, 밀려오는 인간적인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당대의 의인이자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조차도 시편 속에서 원수들을 향해 거침없는 저주를 쏟아내는 장면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편 69:27-28)

    이토록 독한 탄식을 읽을 때면 문득
    ‘우리도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다윗처럼 원망 섞인 기도를 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정직한 의문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면, 다윗에게서 한 가지 중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하나님께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괜찮은 척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아름다운 말만 골라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했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했으며, 원수가 미우면 그 마음까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쏟아놓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기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너무 빨리 실천하려 합니다.
    그래서 아직 아픈 마음을 억지로 눌러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다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상처가 피를 흘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상처를 덮어놓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미워할 감정조차 느끼지 말라는 명령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미움과 분노를 품은 채로도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주님, 저는 저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제 마음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하나님께 맡기다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을 생각해도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날도 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내 마음의 힘으로 원수를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의 미움을 조금씩 덜어내시도록 맡겨드리는 일이었다는 것을.

    다윗도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분노가 있었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탄식은 저주의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울부짖던 사람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고,
    자신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마침내 찬양으로 돌아옵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도의 신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 숨기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하나님께 모두 보여드리는 일입니다.

    미움까지 보여드리고,
    분노까지 보여드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누군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면
    억지로 “나는 사랑해야 해”라고 자신을 다그치기보다 이렇게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주님, 아직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해주십시오.”

    그 기도가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는 길의 첫걸음일 것입니다.

    작은 씨앗 하나가 땅속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을 지나 싹을 틔우듯이,

    우리 마음속의 용서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겨진 마음에는
    분명히 때가 되면 싹이 날 것입니다.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명령인 동시에, 가장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초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윗을 다윗답게 만든 것

    구약 성경의 역사를 읽다 보면 수많은 왕의 흥망성쇠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던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물론이고, 선한 정치를 펼치다가도 노년에 교만해져 징계를 받았던 남유다의 여러 왕을 보며 인간의 연약함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왕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왕은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고,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실 만큼 다윗은 우리 신앙인이 평생 본받아야 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장점은 바로 철저하고 정직한 회개였습니다.

    다윗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는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른 왕들과 달랐던 점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결코 변명하거나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왕의 권위와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밤마다 침상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만을 구했던 그 겸손함이 바로 다윗을 가장 다윗답게 만든 최고의 장점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신뢰했던 사람입니다.

    청소년 시절 골리앗 앞에서도, 사울 왕에게 억울하게 쫓기던 긴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원수를 스스로 갚지 않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늘 하나님께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 물으며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다윗이 위대했던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넘어졌을 때 주님 앞으로 즉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는 겸손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 바로의 조롱 너머에 보이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본심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번역된 문장만으로는 도무지 맥락이 잡히지 않아 잠시 멈춰 서게 되는 구절을 만납니다. 출애굽기 10장 10절에서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말도 그런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을 섬기게 해 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비웃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까지 조롱하는 듯한 말을 내뱉습니다.

    처음 이 말씀을 읽으면 그 표현이 다소 낯설고 뜻이 쉽게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바로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면, 이 말 속에는 단순한 거절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오만과 이스라엘을 향한 잔인한 조롱이 담겨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1. 번역의 간극 너머, 그 시대를 엿보다


    성경은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언어 감각만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한 구절을 읽을 때에는 단순히 문장 하나만 떼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건네졌는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권력과 힘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실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사람의 조롱이나 거절 때문에 중단되지 않습니다.

    2. 성경 읽기, 지식이 아닌 ‘본심’을 만나는 시간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고대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일까요. 어려운 문장의 뜻을 풀어내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복잡한 문장들 사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세상은 때때로 바로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너를 도우실 수 있겠느냐?”

    어려움이 길어지면 우리 마음속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올라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실까?’
    ‘왜 하나님은 아직도 이 일을 허락하고 계실까?’
    ‘이 길이 정말 맞는 걸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눈앞의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지 말라고.

    바로의 조롱이 끝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눈앞에 놓인 난관도 결코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아닙니다.

    3. 오늘, 우리 삶의 기준이 되는 말씀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은 복잡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목소리는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옳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저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적어도 내가 어느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는 조금씩 분명해집니다.

    무엇이 참인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를 말씀 안에서 다시 묻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경을 펼칩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소리에 흔들리는 대신,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진리 위에 내 삶을 조금씩 세워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생각
    말씀 한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는 일은 어쩌면 보물찾기와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뜻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오래 바라보고,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고, 그 말씀을 오늘의 내 삶에 비추어 보면 어느 순간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의미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로의 조롱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으려 했어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세상의 조롱처럼 느껴지는 일이나,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난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바라본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조금 더 알아가며,
    눈앞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든든히 붙들어 주어,
    어떤 순간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우리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질서

    성경의 첫 페이지를 펼치다 보면 인간의 지식만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늘을 궁창으로 나누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정말 하늘 저 너머에 물이 있다는 뜻일까?”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품어 보았을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금 더 오래 묵상하다 보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1. 과학적 호기심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보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초의 지구를 둘러싼 수증기층이나 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혼돈 가운데 있던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를 찾아가는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탐구하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은
    ‘그 물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더 놀라운 사실은,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시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세우셨고,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셨으며,
    텅 빈 세상에 생명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2. 혼돈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질서


    우리의 삶도 때로는 아무런 질서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첫 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처음부터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나하나 질서를 세워 가셨다는 것입니다.

    궁창을 세우시고 물을 나누신 창조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 가운데 경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마련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내 눈에는 아직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계실지 모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평범하게 숨을 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작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해 보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3.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신뢰할 수 있는 이유


    현대 과학은 우주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간다 해도 이 거대한 우주의 모든 신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내 삶에 찾아온 혼돈도 그렇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내게 이런 시간이 허락되었는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삶의 퍼즐 조각들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에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내 작은 삶을 모르고 계실 리는 없습니다.

    내가 지금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길을 준비하시고,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삶의 자리를 정돈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도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삶의 조각들 앞에서도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평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지금은 혼돈처럼 보이는 시간이
    훗날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세워 가시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은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니까요.

    궁창을 세우시고 혼돈 가운데 질서를 이루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삶의 작은 자리까지 살피고 계심을 믿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내 삶도
    그분의 손 안에서는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져 가고 있음을 믿으며,
    오늘도 조용히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렵니다.

  • 사랑의 달콤한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열왕기상 13장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묵직해집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두 선지자의 슬픈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상숭배로 가득했던 벧엘의 제단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젊은 선지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곳으로 갔고, 맡겨진 말씀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담대했던 하나님의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뜻밖의 시험을 만납니다.

    바로 동료 선지자였던 한 늙은 선지자의 말이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짓말하며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가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셨다.”

    젊은 선지자는 처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 길을 걸으며 지쳤던 그는 결국 그 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달콤한 말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말은 언제나 험악하거나 거칠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때로는 믿음직해 보이는 사람의 입술을 통해,
    정겨운 위로나 호의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겠지.”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니까 틀림없겠지.”

    “이 정도는 해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들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앞세우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의 비극은 단순히 거짓말에 속았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신뢰했던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큰일을 해냈다고 해서 언제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어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의 분별까지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극의 자리에서 울려 나오는 한 노인의 통곡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 가슴 아픈 장면이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행동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가에 놓인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의 묘실에 장사하고, 그를 향해 이렇게 슬퍼합니다.

    “오호라 내 형제여.”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뼈를 그 하나님의 사람 곁에 장사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늙은 선지자의 마음속에도 깊은 회한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거짓된 말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양심은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니까 틀림없겠지.”

    “이 정도는 해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들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앞세우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의 비극은 단순히 거짓말에 속았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신뢰했던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큰일을 해냈다고 해서 언제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어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의 분별까지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극의 자리에서 울려 나오는 한 노인의 통곡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 가슴 아픈 장면이 있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행동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가에 놓인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의 묘실에 장사하고, 그를 향해 이렇게 슬퍼합니다.

    “오호라 내 형제여.”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뼈를 그 하나님의 사람 곁에 장사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늙은 선지자의 마음속에도 깊은 회한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거짓된 말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양심은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그의 눈물은 단순히 죽은 선지자를 향한 슬픔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뒤늦게 무너지는 한 사람의 아픈 마음도 그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양심은 때로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말에 흔들릴 때도 있고,
    내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미룰 때도 있습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찾아오는 양심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 아픔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죄를 짓고도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생각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을 내 편의대로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사람의 달콤한 말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하소서.
    세상의 그럴듯한 목소리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혹여 내가 길을 잃었을 때에는 양심의 작은 울림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길에서 즉시 돌이킬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오늘도 수많은 목소리가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 모든 소리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가장 먼저 알아듣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들녁에서 드리는 눈물겨운 예배

    우리는 흔히 화려한 조명이 켜진 

    높고 웅장한 예배당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릴 때만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 여기곤 하지요.

    그러나 오늘,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창가에 앉아

    투박한 명자나무 몸통에 피어난 명자꽃 세 송이와

    단단한 아스팔트를 쩍 갈라내고 솟아오른 

    연약한 들풀 한 포기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 작은 피조물들의 숨소리 속에서

    나는 예배당의 그 어떤 설교보다 

    더 웅장하고 세밀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마주합니다.

    아기 싹을 위해 자신의 두꺼운 살을 쩍 찢어 

    숨구멍을 내어준 고목의 양보 속에서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서 온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눈물겨운 보혈의 희생을 봅니다.

    손가락으로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한 어린 들풀이 어떻게 단단한 돌바닥을 뚫었을까요?

    그것은 거대한 장벽 밑에서 숨겨진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찾아내어 새싹의 세포 속으로 묵직한 물방울을 가득 채워주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심한 손길 덕분이었습니다.

    내 눈에서 마르지 않고 흐르는 이 감격의 눈물은

    비정하고 삭막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살아서 숨 쉬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가장 순결한 고백입니다.

    일흔넷의 지고 지난했던 인생의 거친 껍질 속에서도

    끝까지 나를 눈동자처럼 아끼고 기르시는 

    주님의 세밀한 사랑이 들녘 가득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살아 숨 쉬는 주님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타오르는 자연 앞에서 

    가장 깊고 신령한 삶의 예배를 올려 드립니다.

    “주님, 교회의 문턱을 넘어 

    이 거대한 자연 성전 속에서 일하시는 

    당신의 살아있는 손길에 날마다 감격하게 하소서.

    들녘의 들풀 하나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내 남은 생애도 오직 주님 가신 길만을 노래하는 

    작고 아름다운 들녘의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

  •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애굽기 16:3)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주려 죽게 되었다’며 불만을 터뜨립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그들이 곧바로 원망했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악해서라기보다 눈앞의 ‘생존의 위협’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어제의 은혜보다 오늘의 결핍을 먼저 바라보게 합니다.

    1. 기적보다 민감한 ‘당장의 빵’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거)보다 당장 내 손에 들린 빵(현재)에 더 민감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통장 잔고나 자녀 문제, 건강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께 받은 은혜보다 눈앞의 현실에 더 사로잡혀 불안해합니다. 기억은 단기적이고 불안은 본능이기에, 어제 받은 큰 은혜도 우리는 아주 쉽게 잊어버리고 눈앞의 현실에 삼켜지곤 합니다.

    2. 비판 뒤에 숨은 나의 불안

    우리가 타인을 향해 서슴없이 ‘믿음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일지 모릅니다.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에, 타인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라는 착각 속에서 안도감을 찾는 것이지요. 결국 타인을 비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똑같은 불신과 원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3. ‘목이 곧은 백성’, 바로 나 자신

    그러므로 ‘목이 곧은 백성’은 멀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을 보며 “믿음이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어쩌면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나 역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는 나의 본성을 숨기려는 연기일지도 모릅니다.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망하는 이들을 보며 비판하기보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들의 불안이 곧 나의 불안입니다. 하나님,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듯 나의 마음도 붙잡아 주시옵소서.”

    4. 오늘의 고백

    성경을 읽으며 그저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라고 결론 내리는 대신, 이렇게 고백해 봅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을 보며 믿음 없다고 손가락질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곧 나의 민낯이었고, 우리는 매일 기적을 경험하고도 매일 원망하는 목이 곧은 자들입니다. 선지자를 배척하고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던 사람들을 보며, 만일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고백합니다.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 진실한 고백 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지휘봉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

    한때 저는 꽤 까다로운 성가대 지휘자였습니다.

    성가대원들의 작은 음정 하나, 미세한 박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틀린 음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했고, 흐트러진 박자는 정확하게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제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화음보다 대원들이 실수했던 장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금만 더 정확했더라면…’

    ‘한 번만 더 맞추었더라면…’

    언제나 제 관심은 더 완벽한 찬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가대 연습을 인도하던 중 제 마음에 질문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지휘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제 마음을 깊이 흔들었습니다.

    혹시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찬양의 본질보다 음악적인 완성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은 오랫동안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성가대는 「사명」이라는 찬양을 연습하게 되었습니다.

    지휘를 하며 가사를 따라가던 중 한 구절에서 제 손이 멈추었습니다.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그 순간 그 가사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들려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는데,

    나는 대원들이 음정을 틀렸다는 이유로 쉽게 실망하고,

    박자가 흔들렸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작 삶에 지쳐 힘겹게 예배당에 나온 대원들의 마음은 한 번도 깊이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지휘자가 가장 먼저 맞추어야 하는 것은 음정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후 제 지휘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중요합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예배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찬양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화음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지휘대에 서면 먼저 지휘봉보다 대원들의 눈을 바라봅니다.

    삶에 지친 사람은 없는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부족한 화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흔들리는 음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품는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찬양을 가장 아름답게 받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성가대는 완벽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기도합니다.

    우리의 찬양이 사람의 귀를 만족시키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 당신의 마음은,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나요?

    광야 같은 거친 세상을 걷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막’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짓게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엄격한 규정과 질서가 가득한 장소였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보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들의 한가운데로 직접 찾아와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시려는, 어떤 거대한 사랑의 흔적이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완벽하고 거룩한 존재가 왜 굳이 흠 많고 불안한 우리들의 삶 한가운데 머물길 원하셨을까요? 그저 멀리서 지켜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그분은 성막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와 끊임없이 눈을 맞추고 대화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필요가 아닌, 오로지 우리를 위한 ‘다정하고도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그분께서 스스로 만드신 사랑의 징검다리였던 셈입니다.

    그 마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집니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가 외로울 때, 길을 잃었을 때, 혹은 세상 속에 치여 나 자신을 잃어갈 때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셨으니까요.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맞이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매일 쏟아지는 일상의 걱정과 욕심으로 마음의 방을 가득 채우다 보니, 정작 내 곁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요.

    “당신은 오늘, 당신의 마음속에 그분을 위한 작은 자리를 마련해 두었나요?”

    질문은 단순하지만, 그 울림은 참 묵직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사랑 때문일 테니까요. 거창한 종교적 형식을 떠나, 오늘은 그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잠시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일상이 그 사랑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마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요한 평안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라는 사람 그 자체가, 그분이 머무시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