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신앙 묵상

  • 완벽한 동산에서 우리는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까

    인류의 시작이라 불리는 아담의 이야기는 늘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완벽한 환경 속에서 창조주와 매일 동행하던 그들이 왜 단 하나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이 아픈 사건은 수천 년 전 한 사람의 실수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던져지는 묵직한 질문이지요.

    “우리는 정말 그분을 사랑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분이 주시는 환경과 축복만을 의지하는 걸까요?”

    하지만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우리를 다그치거나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앞의 유혹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가’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1. 왜 그런 약속을 만드셨을까요?

    가장 큰 의문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선악과를 두셨을까?”

    저 역시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반려동물을 지켜보며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기다려”라고 말할 때, 강아지는 단순히 힘에 눌려 억지로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향한 전적인 신뢰, 그 믿음 때문에 스스로 자리를 지키며 인내하는 것이죠. 그 자발적인 순종을 볼 때 주인은 비로소 깊은 사랑의 기쁨을 느낍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는 단순히 열매를 먹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주를 진정으로 신뢰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사랑의 증명’**이었던 셈입니다.

    2. 실패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발걸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약속 앞에서 매번 실패합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내 뜻을 더 앞세우며 소중한 신뢰를 저버리곤 합니다. 아담이 부끄러움에 나무 뒤로 숨었을 때처럼, 우리도 실수한 뒤엔 그분 앞을 피하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성경의 진짜 이야기는 우리의 실패가 아닙니다. 숨어버린 우리를 먼저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다정하게 물으시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심판보다 앞선 그분의 발걸음은 언제나 ‘찾아감’에 있었고, 부끄러워 떠는 우리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그 애틋함이 결국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됩니다.

    3. 오늘, 우리 인생의 동산에서

    오늘도 우리는 삶의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합니다. 내 생각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을 신뢰할 것인가.

    비록 우리의 자유의지는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인생의 동산에서 주님을 향한 나의 신뢰가, 그 어떤 화려한 성취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나의 이 작은 자유가, 당신께 드리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고백이 되기를.

  • 방충망 너머의 손님, 창가에 찾아온 늠름한 황조롱이

    평화로운 오후, 창문 가까이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방충망 틀 위에 귀한 손님인 황조롱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쉬고 있는 녀석의 깃털 결마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조심스럽고 반가운 마음에 스마트폰을 들어 셔터를 누르는 순간, 황조롱이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이 마주쳤고,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라 힘찬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시골에 살다 보면 자연 속에서 인간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짐승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문득 창세기의 기록처럼, 인간의 죄로 인해 피조 세계의 조화가 깨어지고 서로를 두려워하게 된 세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경쟁과 생존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도 서로를 경계하며 높은 장벽을 쌓고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반면,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반려동물은 아무런 조건 없이 저를 믿고 따르며 무조건적인 수용과 신뢰를 가르쳐 줍니다.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갈 때 비로소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일서 4:18)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향한 경계의 빗장을 풀고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마당을 스쳐 간 황조롱이를 떠올리며,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 따뜻한 신뢰와 위로가 꽃피는 하루를 그려봅니다.

  • 제비 둥지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은혜

    아침이면 시골집 마당이 가장 먼저 활기차게 하루를 열어젖힙니다. 창문을 넓게 열면 여기저기서 청아하게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날아다니며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는 새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자연도 쉼 없이 부지런히 살아간다는 경이로운 생명의 질서를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마당 처마 밑에는 제비 한 쌍이 찾아와 다정하게 둥지를 틀었습니다. 며칠 전 부화한 네 마리의 어린 새끼들은 노란 주둥이를 하늘로 한껏 치켜들고 어미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먹이를 부리 가득 물고 돌아온 어미 제비는 제 몸이 지칠 법도 하건만, 잠시도 쉬지 않고 새끼들에게 공평하게 먹이를 나누어 주느라 분주합니다.

    1. 약한 자를 먼저 살피는 ‘위대한 모성’

    그런데 며칠 동안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조금 신비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제 눈에는 네 마리 새끼 모두 비슷해 보였는데, 어미 제비는 유독 한 마리에게만 먹이를 훨씬 더 자주, 정성껏 물어다 주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마음을 기울여 그 이유를 살핀 끝에, 저는 그 눈물겨운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어미 제비가 유독 정성을 쏟던 그 새끼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눈에 띄게 몸집이 작고 힘이 약했습니다. 어미는 둥지 안에서 목소리 크고 힘센 새끼가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경쟁하기 힘든 가장 연약한 새끼를 본능적으로 먼저 살피고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애틋한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대자연을 ‘적자생존’의 냉혹한 세계라고 말합니다. 냉혹한 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계에서 오직 강한 생명만이 선택받아 살아남는다는 관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처마 밑 작은 제비는 제게 전혀 다른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강한 자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둥지 구석에서 소외된 가장 약한 자를 먼저 돌아보고 품는 자비로운 마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2.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시선

    그 가슴 뭉클한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도 이와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시는 동안 언제나 가장 낮고 약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고치셨고,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또한,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한 양을 뒤로하고 길 잃은 소중한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험한 길을 마다치 않으셨던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냉정한 법칙은 언제나 능력 있고 화려한 자들을 주목하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파하는 사람을 눈동자처럼 먼저 품으시고 위로하십니다. 어미 제비가 연약한 새끼에게 먹이를 더 많이 나누어 주듯, 우리 하나님께서도 세상이 외면하는 그 한 사람에게 당신의 온기와 은혜를 더 깊이 쏟아부으십니다.

    3. 가정이라는 울타리, 그 사랑의 무게를 배웁니다

    저는 우리의 소중한 가정도 바로 이러한 제비의 모성애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똑같이 대하는 무미건조한 공평함이 아니라, 오늘 하루 유독 힘들어하는 가족을 더 따뜻하게 안아주고, 낙심한 이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해 주는 넉넉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세상이 아무리 차가운 광야 같을지라도 그 가정은 무엇보다 포근하고 따뜻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마당 한편 작은 제비 둥지를 바라보며 부모가 가져야 할 참된 사랑의 무게를 다시금 겸손히 배웁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소중한 그 한 영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한 아침입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토록 따뜻한 위로의 어미가 될 수 있기를, 나보다 더 약한 이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그 지극한 사랑의 섭리가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 세상의 기준이 모서리를 깎아낼 때:조각목에서 발견하는 위로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목공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최고급 원목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적이 있으실 겁니다. 결이 곧고 옹이가 없는 매끄러운 목재는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아 훌륭한 가구의 재료가 되죠. 반면, 거친 환경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뒤틀린 나무는 가공하기 까다로워 보통은 건축 자재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역사적·고고학적 문헌이나 성경 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시팀나무(아카시아 나무의 일종, 조각목)가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메마른 사막과 광야의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이 나무는 줄기가 뒤틀리고 온통 옹이투성이로 자라납니다. 눈길을 줄 만한 화려함이나 곧은 기품과는 거리가 멀죠.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과 전통을 담은 성경에서는 이 볼품없는 조각목이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공간인 성막의 뼈대와, 가장 거룩한 보물인 언약궤를 만드는 핵심 재료로 쓰였다고 전합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주목받지 못할 이 나무가 어떻게 가장 귀한 자리에 놓일 수 있었을까요?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들의 이야기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며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힙니다.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만 왜 이토록 모난 모습일까 자책하기도 하고,

    남들은 다 곧고 평탄하게 인생의 길을 닦아나가는 것 같은데, 내 삶에는 상처와 흉터라는 옹이만 가득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기준은 늘 ‘곧고 반듯한 나무’입니다. 흠집 하나 없는 매끄러운 스펙, 완벽하게 정돈된 일상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죠. 그래서 굽어지고 뒤틀린 우리의 상처는 감추어야 할 결점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조각목의 가치는 나무 그 자체의 완벽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듬어지고 입혀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가치

    조각목이 거룩한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과정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 나무가 원래부터 곧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숙련된 장인의 손길에 의해 다듬어지고 그 위에 순금이 덧입혀졌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튀어나온 옹이는 깎여 나가고, 뒤틀린 결은 장인의 도구에 의해 반듯하게 다듬어집니다. 그리고 그 위에 찬란한 순금이 입혀질 때, 비로소 내면의 볼품없음은 사라지고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귀중한 보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죠.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상처나 실패, 혹은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난 구석들은 어쩌면 완성이 아니라 다듬어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척도로는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그 굽어진 굴곡마다 깊은 이해와 연륜,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은혜가 덧입혀질 때 우리는 그 어떤 곧은 재목보다 더 깊고 단단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가장 아픈 곳에 가장 찬란한 빛이

    혹시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뒤틀려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남들은 다 평탄한 길을 가는 것 같은데 나만 홀로 광야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오시나요?

    그렇다면 어쩌면 당신은 지금 인생이라는 거대한 장인의 손길 아래에서, 가장 귀한 작품으로 빚어지고 있는 순간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옹이진 상처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아픔이 머문 자리에 더 단단한 결이 생기고, 언젠가 그 삶의 흔적 위에 따뜻하고 찬란한 빛이 입혀지는 날,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거친 광야에서 저마다의 옹이를 품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응원해 봅니다.

  • 진정한 신앙과 삶의 본질: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두 노인’이 던지는 질문

    우리는 인생이라는 순례길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을까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두 노인은 부유하지만 형식에 매인 예핌과,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엘리사의 성지순례 여정을 통해 진정한 신앙과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깊은 성찰을 제시합니다.

    1. 목적을 위한 수단인가, 사랑의 실천인가?

    소설의 전환점은 두 노인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농가를 마주했을 때 찾아옵니다. 성지순례라는 목표 완수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 예핌과 달리, 엘리사는 자신의 여비를 털어 그들을 돕습니다. 결국 엘리사는 순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성지에 도착한 예핌은 환영 속에서 누구보다 고결하게 빛나는 엘리사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를 통해 진정한 신앙은 거창한 성과가 아니라, 내 곁의 이웃을 향한 실천적 사랑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2. 형식이라는 껍데기를 넘어서는 법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성과와 정해진 규칙이라는 형식에 매몰되곤 합니다. 예핌처럼 거룩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주변의 고통을 외면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선택은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줍니다. 진정한 가치는 먼 곳에 있는 이상이 아니라, 지금 내 곁의 이웃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길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는 성지로 향하던 길을 멈췄지만, 고통받는 이웃을 구원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사랑의 본질을 완성했습니다.

    3.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겸손한 이타심

    엘리사는 자신이 도운 가족이 자립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를 뜹니다.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는 그의 모습은 이기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성의 본질을 상기시킵니다. 나눔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될 때 비로소 진정한 빛을 발합니다.

    두 노인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지금 형식이라는 껍데기를 향해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참된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가?”

    마치며: 당신의 일상은 성스러운 순례길입니까?

    거창한 말보다 묵묵한 실천을 보여준 엘리사의 발자취는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분명한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의 평범한 일상 또한 가장 성스러운 순례의 길이 될 것입니다.

  • 강가 둑길에서 만난 신비:물안개와 풀벌레가 그린 수채화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온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이른 새벽, 저는 평소처럼 소박한 차림을 하고 집 근처 강가 둑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70대를 훌쩍 넘긴 나이이지만, 매일 아침 길을 나서는 이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과 독대하는 저에게 가장 소중한 예배의 시간입니다.

    1. 물안개가 그려낸 하늘의 경계

    둑길 위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대자연이 빚어낸 경이로운 풍경 앞에 깊은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새 차가워진 공기와 따스한 강물이 만나 피어오른 뽀얗고 하얀 물안개가 온 강물을 가득 채우며 몽환적인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물에서 가득 피어오른 그 신비로운 물안개는 흐르는 물줄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공중의 빈 공간 사이에서 하늘의 경계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이 경이로운 새벽의 질서와 조화를 바라보며, 제 가슴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잔잔한 찬송이 피어올랐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이 물안개와 같지 않을까요?

    존재하지만 실체를 다 알 수 없고, 흐르는 시간 속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거대한 오선지 위에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 벅차게 다가왔습니다.

    2. 엄마 오리 가족의 다정한 행진

    물안개의 장막을 뚫고, 시선 아래로 사랑스럽고 다정한 오리 가족 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듬직한 엄마 오리는 아직 날갯짓조차 서툰 아기 오리들을 다정하게 뒤에 데리고, 자욱한 물안개 속을 유유히 헤엄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오래전, 제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날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때는 저도 엄마 오리처럼 아이들을 지키느라, 또 먹이고 입히느라 얼마나 동동거리며 살았던지요. 어미 제비의 지극한 모성애처럼, 오리 가족 역시 창조주께서 태초부터 심어두신 사랑의 법을 가만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강물이라는 거대한 오선지 위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동동거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도 연약한 저를 이렇게 아기 오리처럼 품어주셨음을 깨닫습니다.

    때로는 거친 세파에 밀려 힘겨웠던 날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마다 저를 지켜주셨던 주님의 손길이 오리 가족의 행진처럼 다정하게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3. 작은 풀벌레가 선물하는 웅장한 합창

    평화로운 행진을 환영이라도 하듯, 강가 주변의 푸른 풀숲 사이에서는 정겨운 소리들이 일제히 울려 퍼졌습니다. 수풀이 우거져 육신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작은 풀벌레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몸집은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의 시선에 쉽게 뜨이지 않지만, 그들이 쏟아내는 “찌르르, 찌르르” 하는 합창 소리는 가히 대자연 전체를 쓸어 담을 만큼 웅장하고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누가 시키는 이도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건만, 저마다의 악기를 들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하늘을 향해 찬란한 새벽 합창을 선물하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화려한 바벨탑을 쌓으며 내 이름을 드러내려 애쓰지만, 하나님께서는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저 풀숲 속 작은 벌레의 신음과 노래까지도 이토록 세밀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척박한 인생 광야를 걷는 우리의 삶도 때로는 이름 없는 풀벌레처럼 연약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귀로 들리는 이 소박한 합창 소리가 제 영혼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며, 하나님은 매일 아침 일상의 소소한 은혜를 통해 제 영혼을 다정하게 위로하고 계심을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4. 나를 세밀하게 돌보시는 창조주의 품

    강가 둑길을 걸으며 저는 생각합니다. 저 풀벌레들의 노래가 새벽 공기를 타고 제 귓가에 이토록 정겹게 전달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 또한 하나님께 이토록 아름답게 전달되고 있을까요?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힘과 명예를 자랑하며 탑을 쌓을지라도, 저는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삶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찬송하기로 다짐합니다.

    창조주의 완전하신 관심 밖에는 단 하나의 생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 저에게 보여주신 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은, 지친 저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세밀한 연애편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내 이름을 세상에 내세우려던 교만함을 다 내려놓습니다. 대신, 나를 눈동자처럼 세밀하게 돌보시는 사랑의 아버지 품 안에서 더 깊은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비록 나의 삶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이 새벽 합창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평화로운 둑길을 따라 오늘도 제 삶의 예배가 이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돌보시는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저는 다시 힘을 내어 저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의 무대로 나아갑니다.

  • 높이 쌓일수록 허전해지는 이유, 우리 마음속이 ‘바벨탑’

    우리는 흔히 바벨탑 이야기를 들으면, 하늘 끝까지 닿으려다 결국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탑과 그에 따른 엄중한 심판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가만히 그 장면을 다시 묵상하다가 문득 낯설고도 묵직한 질문 하나가 제 마음을 툭 건드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만든 세상이 당신을 등지고 스스로 높아지려 할 때, 당신을 지은 그 존재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쌓아 올린 그 탑을 묵묵히 내려다보시던 그분의 마음. 그것은 단순히 노여움이 아닌, 어쩌면 억장이 무너지는 부모의 슬픔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1. 우리는 왜 자꾸 우리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할까요?

    성경 속 사람들은 외칩니다.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흩어지지 않게 힘을 모으자!

    표면적으로는 공동체의 결속과 견고함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고, 나를 만드신 분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망이었죠.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늘 이런 나만의 을 쌓고 싶어 합니다. 더 높이, 더 견고하게, 더 유명하게.

    2. 기술이 아닌, 그 마음의 방향을 보셨을 겁니다

    사람들은 탑을 높이 쌓는 기술에 열광했지만, 그분을 아프게 한 것은 건축의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벽돌 하나하나 사이에 촘촘히 박힌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오만함서로를 밀어내는 사악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전의 아픔(홍수)을 딛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었건만, 인간은 그 은혜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곳에 오르려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치고 위험한 벼랑 끝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볼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미어지셨을까요.

    3. 오늘 우리 시대의 ‘바벨탑’은 무엇일까요?

    바벨탑 이야기는 먼 옛날의 고대 신화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곁에도 첨단 과학과 편리함, 그리고 끝없는 성취라는 이름의 바벨탑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고대 사람들보다 더 영악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은혜를 당연하게 누리면서도, 정작 삶의 주인은 라고 외치며 살아가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죄는 단호하게 바로잡으시지만, 파멸해가는 사람을 보며 끝내 눈물을 멈추지 못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4. 그분의 눈물, 가장 애틋한 사랑의 언어

    누군가 파멸을 앞두고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훗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흘리셨던 눈물은, 바벨탑을 내려다보시던 그분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차가운 회초리를 들기 전에, 그분은 늘 뜨거운 눈물로 먼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가장 깊은 속마음은 처벌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긍휼과 영원한 사랑이었으니까요.

    [오늘의 생각]

    오늘 저는 창밖의 새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 한구석에 은밀하게 쌓아 올린 욕심의 바벨탑들을 조용히 허물어 봅니다. 내 이름을 드러내려던 교만함 대신, 나를 가장 세밀하게 살피시는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요.

    세상은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탑을 쌓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화려한 성 대신 그분의 따뜻한 사랑이 머무는 자그마한 일상의 자리를 가꾸어 보려 합니다.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곁에 있는 분과 눈을 맞추는 것이니까요.

  •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작은 등불

    컴퓨터도, 인터넷도 제게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주변에서는 이 나이에 왜 그렇게 힘든 일을 시작하느냐고 염려 섞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저도 가끔은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제게 맡기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목회의 길을 걷는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외딴 시골과 개척교회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의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분들은 화려한 무대보다 작은 예배당을 지키며, 풍족한 생활보다 복음의 가치를 선택한 분들입니다.

    때로는 당장의 생활이 지독하게 어려워도 맡겨진 사명을 결코 내려놓지 않는 눈물의 기도들을 보며, 제 마음은 늘 빚을 진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저 역시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지만, 늘 작은 힘이나마 나누며 살아가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일에는 언제나 뻔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 아주 세미한 음성 같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내가 가진 투박한 글도 누군가를 돕는 따뜻한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작은 소망의 씨앗 하나가 저를 이 낯선 블로그 공간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곳에는 세상이 말하는 화려하고 대단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살아오며 만났던 다정한 사람들, 아침 창밖에서 노래하는 참새 한 마리,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 대자연이 거저 들려준 깊은 지혜, 그리고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깨달은 작은 은혜들을 차곡차곡 담아가려고 합니다.

    혹시 이 소박한 글들이 지친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삶을 다시 바라볼 용기를 주며, 하나님을 조금 더 가까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제게는 더없는 감사이자 기쁨일 것입니다.

    솔직한 고백을 하나 드리자면, 이 블로그에는 작은 광고들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그 광고를 통해 아주 작은 수익이 생긴다면, 저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자립교회 목회자분들과,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이웃들을 섬기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비록 지금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방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물방울들이 모여 시냇물을 이루듯, 이곳에 쌓일 한 편 한 편의 글이 모여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가 되고, 외로운 이에게는 위로의 손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결코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 배우고, 사소한 것에 넘어지고, 또다시 은혜로 일어서며 하나님을 묵묵히 따라가려고 버둥거리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일 배워가는 한 순례자의 소박한 발자국을 남기는 공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고 서툴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며 오늘 벅찬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오늘 이 작은 첫걸음이 언젠가는 누군가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제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는 귀한 한 분께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가 늘 강물처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