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일상 & 사색

  • 평상

    시골 마당 한구석이나 동네 아름드리나무 밑에는 으레 나이 든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날이 따스해지면 동네의 모든 일상은 그 네모난 나무 침대 위로 모여들곤 했습니다.

    평상은 온 동네 사람들을 품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거실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다듬던 파란 나물 줄기가 놓였고,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는 농사일에 지친 아버지가 밀짚모자를 벗어 얹어두고 달디단 낮잠을 청하던 쉼터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가방을 팽개치고 올라앉아 서투른 공기놀이를 하던 놀이터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평상에 자리를 예약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앉아 있으면 나중에 온 사람은 옆에 슬쩍 엉덩이를 걸치면 그만이었습니다.

    말이 많으면 많은 대로,

    말이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았습니다.

    누군가는 나물 다듬는 손을 쉬지 않았고,

    누군가는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동네 소식을 전했고,

    누군가는 그저 앉아 하늘만 바라보다 돌아갔습니다.

    평상은 누구에게도

    “무슨 일을 하러 왔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오면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지요.

    요즘 우리의 거실에는 푹신한 소파도 있고, 좋은 의자도 있지만

    그 옛날 평상처럼 아무나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약속을 하고,

    만나서도 바쁘다는 말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옛날 평상에는

    사람이 사람 곁에 머무를 시간이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면 평상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어른들의 이야기가 잦아들 무렵이면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면 하루 종일 사람들의 온기를 받아낸 평상만이

    말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문득 그 평상을 떠올리며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도 그런 평상 같은 분이 아니셨을까.

    지친 사람이 오면 쉬어갈 자리를 내어주시고,

    슬픈 사람이 오면 말없이 곁을 내어주시고,

    잘난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그 품 안에 머물게 하시는 분.

    우리는 때때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도

    괜찮은 모습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잘해야 할 것 같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 같고,

    마음속에 부끄러운 것이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옛날 평상

    깨끗하게 씻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농사일로 땀에 젖은 사람도,

    흙 묻은 아이도,

    마음이 무거운 사람도

    그저 와서 앉으면 되었습니다.

    어쩌면 주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잘하고 오려 하지 말고,

    그냥 내게 와서 앉아 있으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날에는

    그저 주님 곁에 앉아 있어도 되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눈물만 흘리다 가도 되고,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날에는

    “주님…” 그 한마디만 남겨놓고 가도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리.

    어린 시절 마당 한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평상

    이제 어디에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그 평상이 내어주었던 자리는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생각합니다.

    사람이 지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세상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도

    잠시 내려놓고 앉을 수 있는 자리 하나.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잘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주님은 오늘도 그런 평상을 우리 앞에 놓아두고

    말없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어서 오너라.

    여기 앉아 쉬어라.”

    그 옛날 평상처럼

    말없이, 넉넉하게. 🌿

  • 빨랫줄에 널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마당을 가로지르던
    옛날 빨랫줄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집니다.

    그 시절의 빨랫줄은
    단순히 빨래를 널어 말리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허물을 묵묵히 받아 안아주던
    넉넉한 품이었습니다.

    장롱 깊숙이 아껴두었던 고운 나들이옷이든
    빛바랜 후줄근한 작업복이든
    가리지 않고 제 몸을 내어줍니다.

    때가 묻었다고 밀어내지 않고,
    오래되어 빛이 바랬다고 외면하지 않고,
    한쪽 구석이 해졌다고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빨래가 자기 몸을 맡기면
    묵묵히 받아주고
    따스한 햇볕 아래 펼쳐 놓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합니다.

    사람은 옷에 묻은 작은 얼룩 하나에도
    마음이 쓰이는데,
    빨랫줄은 온갖 때와 냄새와 구김을
    아무 말 없이 받아줍니다.

    말끔하게 씻겨진 옷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씻어야 할 옷을 받아주는 것이
    빨랫줄의 일이었으니까요.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도 저 빨랫줄에 널린 빨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깨끗하고 반듯한 모습도 있지만,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룩진 모습도 있습니다.

    실수도 있고,
    후회도 있고,
    남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의 구김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깨끗한 모습만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깨끗해진 뒤에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얼룩진 그대로,
    구겨진 그대로,
    때가 묻은 그대로
    주님 앞에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빨랫줄에 널린 옷이
    햇볕을 받아 조금씩 마르고
    바람을 맞으며 냄새를 털어내듯,

    우리의 마음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다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겠지요.

    돌이켜보면
    인생의 어느 계절에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작업복처럼 초라하게 느껴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합니다.

    옷이 낡았다고 빨랫줄이 그 옷을 버리지 않듯,
    내 삶에 얼룩이 있다고 주님께서 나를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을.

    오히려 주님은
    내가 가장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도 아시면서
    그 모든 것을 품어주시는 분이 아닐까요.

    오늘 문득 떠오른 옛날 빨랫줄 하나가
    제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도 괜찮다.
    얼룩이 있어도 괜찮다.
    주님 앞에 그대로 널어놓아라.”

    파란 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던 그 빨랫줄처럼,

    오늘도 주님 앞에
    내 삶을 가만히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햇볕이 빨래를 말리듯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처를 말리고,
    바람이 옷의 냄새를 씻어내듯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묵은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오늘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의 넉넉한 품에 나를 맡겨봅니다. 🌿

  • 세 잎의 행복

    푸른 잔디밭과 시골 들녘 길을 걷다 보면,

    발밑에 무리 지어 피어난 수많은 초록빛 클로버 풀잎들을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수많은 풀잎 속에서 어쩌다 한 번 벼락처럼 찾아오는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잡으려고, 돋보기를 치켜들고 허리를 숙인 채 온종일 찾아 헤매곤 하지요.

    남들보다 더 특별한 행운의 보물을 손에 쥐고

    “심봤다!” 하고 세상 마당에 자랑하고 싶어서,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그 네 잎의 자물쇠를 쫓아 바삐 움직입니다.

    그런데 문득 풀밭 위에 꼿꼿하게 서서 묵상해 보니,

    그 한 장의 행운을 찾기 위해 우리가 무심히 짓밟고 지나간 수백, 수천 장의 ‘세 잎 클로버’들이 눈물겹도록 포착됩니다.

    사람들은 알았을까요.

    흔하디흔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그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바로 내 삶을 등불처럼 지탱해 주는 진짜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찾아올 막연한 네 잎의 행운을 쫓느라, 이미 내 삶의 처소 마당에 카펫처럼, 천국처럼 가득 깔아주신 주님의 신실한 세 잎의 행복들을 얼마나 많이 짓밟고 살아왔던가요.

  • 토동이

    시골에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고라니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도 있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마당에 앉아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생명을 만나기도 한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얼굴은 돌리지 않은 채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검은 물체 하나가 휙 지나갔다.

    “뭐지?”

    순간 또 무슨 짐승인가 싶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산토끼 한 마리였다.

    토끼도 나를 보자마자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 긴장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토끼는 내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 토끼가 나타났다.

    멀찍이 떨어져 나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슬쩍 사라지고, 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 경계하는 눈빛과 어딘가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 자꾸만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 고구마를 잘라 마당에 던져 주었다.

    토끼는 한동안 눈치를 보았다.

    그러더니 살금살금 먹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고구마를 아작아작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도 토끼는 나타났다.

    이번에는 고구마가 아니라 당근을 주었다.

    역시 잘 먹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토끼는 내가 먹이를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손에 들고 토끼에게 직접 먹여 보았다.

    그런데—

    콱!

    토끼가 그 넓적한 앞니로 내 손을 물어버렸다.

    “애구, 놀래라!”

    그런데 이상했다.

    한번 나를 물어버린 토끼는 그 뒤에도 여전히 아침마다 우리 집 마당을 찾아왔다.

    아마 이곳에 오면 먹을 것이 생긴다는 믿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까.

    그날은 조심스럽게 토끼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어찌나 고맙고 감사하던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그 통통한 모습을 보고 토끼에게 이름도 붙여 주었다.

    “토동이.”

    살이 통통 오른 모습이 귀여워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날부터 아침이면 나는 마당에 나가 토동이를 불렀다.

    “토동아!”

    그러면 어디선가 정말 날아오듯 재빨리 나타나 내 앞에 앉았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나는 토동이에게 먹이를 주었고, 우리는 아침마다 작은 행복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마당으로 나가 평소처럼 불렀다.

    “토동아!”

    그런데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불렀다.

    “토동아!”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며칠 뒤에도 토동이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얘가 왜 안 나타나지?’

    혹시 어느 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은 아닐까.

    나는 며칠 동안 토동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만나며 정이 들었던 탓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괜히 마당을 바라보게 되고, 어디선가 통통한 토끼 한 마리가 쪼르르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말했다.

    사람 손에 길들여지지 않았더라면 그 토끼가 지금도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토동이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나를 찾아오던 작은 생명이 있었고,

    나는 그 아이에게 토동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어느 아침부터 토동이는 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가끔 마당을 바라본다.

    혹시나 어디선가 통통한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서.

    토동아.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한번 불러본다.

  • 느티나무

    시골 마을 어귀,
    앞마당 한복판을 지키며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 온
    거대하고 웅장한 느티나무 한 그루.

    사방으로 넓고
    억세게 뻗어나간 가지들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이면

    수많은 나그네와 지친 이웃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는
    고마운 쉼터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거대한 나무가
    처음부터 이토록 웅장한 그늘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겠지요.

    지나온 장구한 세월 동안
    뼈마디가 끊어질 듯한 매서운 추위와
    거센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수없이 벗겨지고 갈라진 껍질의 흔적들은
    어느새 무쇠처럼 단단한 몸통이 되어
    그가 지나온 긴 세월의 수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오직
    한자리만을 지키면서.

    얼마나 지쳤을까요.

    때로는 한겨울 찬바람 속에서
    다 죽어버린 둥치처럼
    말없이 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봄이 오면
    따스한 바람을 타고 돋아나는
    연한 이파리들을
    말없이 두 팔 벌려 끌어안습니다.

  • 잠들어 있던 물줄기를 깨우는 마중물

    우리는 흔히

    마중물이라고 하면

    깊은 지하수를 마중하러 가는

    단순한 한 바가지의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향 마당의 녹슨 펌프 곁에 서서

    바짝 메마른 파이프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마중물조차도 실은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정성 어린 손길로

    한 바가지의 깨끗한 물을 길어

    차갑고 메마른 펌프 속으로

    힘껏 부어주어야만,

    저 깊은 땅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물줄기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방이 꽉 막힌 도심의 가로수처럼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도

    이와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짝 마른 파이프가

    헛된 바람 소리만 토해내듯,

    모진 세상의 풍파와

    가뭄 같은 시련을 지나오다 보면

    우리 안에도 어느 순간

    더 이상 아무런 소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메마른 삶의 틈바구니 속으로

    누군가 대가 없이 건네준

    진심 어린 한마디,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지켜봐 준

    한 번의 기다림,

    그리고 지친 마음을

    가만히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눈길 하나가

    거친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든다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고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중물은

    구하기 어려운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열고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위로 한마디가 마중물이 되고,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기다림이 마중물이 되고,

    따뜻한 눈길 하나가

    메마른 마음을 적시는 마중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 삶에 원래부터

    맑은 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귀한 물을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줄

    따스한 마중물 한 바가지가

    잠시 없었던 것뿐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인생의 마당을 지키시며

    가장 정확한 때에

    마중물을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거센 요동 속에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며,

    나 역시 누군가에게

    따뜻한 생명의 마중물이 되어주기를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혹시 오늘

    메마른 펌프 곁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건네는 작은 한 바가지가

    그 사람 안에 잠들어 있는

    생명의 물줄기를 다시 일으키는

    마중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빛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마당가에 서서

    내 발밑을 소리 없이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 한 자락을

    가만히 굽어봅니다.

    그림자는

    고정된 하나의 형태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의 방향과

    기울어진 햇살의 각도에 따라

    때로는 아스팔트 벌판을 다 덮을 만큼

    길게 몸을 뻗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내 발뒤꿈치 아래로 바짝 몸을 웅크리며

    작고 낮은 모습으로 변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림자는 스스로 빛을 만들지도 못하고

    자기 힘으로 방향을 정하지도 못하면서

    빛이 움직이는 대로

    그 모양을 바꾸어 갑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시선을 조금 달리하여 바라보니,

    문득 저 그림자의 모습 속에서

    험한 세상 틈바구니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지고

    때로는 한없이 작아지며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 같다가도

    내일이면 어느새 길을 잃은 듯하고,

    한때는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림자의 크기와 모양이 변한다고 해서

    빛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 삶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내가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힘겨운 시간을 지나고 있다 해도,

    혹은 발밑에 웅크린 작은 그림자처럼

    내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해도,

    내 모습보다

    나를 비추고 계시는 빛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빛이 어느 방향에서 비추느냐에 따라

    그림자의 모습은 달라지지만,

    빛을 향해 서 있는 한

    그림자는 언제나 내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내 인생의 그림자마저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빛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도 나는

    내 그림자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빛을 바라보며 걸어가려 합니다. 🌿

  • 대자연 앞에서

    매일 아침 마당을 쓸고 나서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대자연이 소리 없이 건네는 조용한 가르침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아무 대가 없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면서도, 기쁨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자연을 향한 미안함이 아련하게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명의 편리함을 위해 푸른 산을 깎고, 그곳에 매끄러운 길을 내고, 집을 짓고, 도시를 넓혀 왔습니다. 인간에게는 발전이었지만, 그 길이 생기기 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온 작은 생명들에게는 어떠했을까요.

    태초부터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동물들에게 우리는 너무 일방적으로 그들의 집을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산속에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먹이를 찾아 내려온 고라니나 산짐승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위험한 도로 가장자리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그 가녀린 눈망울과 마주치는 순간이면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그 눈빛이 제게 묻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가 정말 우리가 살던 곳이었는데…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럴 때면 문득 깨닫습니다.

    우리가 땅을 소유하고, 길을 만들고, 집을 짓고, 자연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해서 이 거대한 대자연의 주인이 인간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어쩌면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인지도 모릅니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며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 그리고 길가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작은 생명 하나까지도 모두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존재했던 생명들입니다.

    그러니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감사만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고마움과 함께 미안함도 있어야 하고, 누리는 기쁨과 함께 지켜 주어야 한다는 책임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도 마당을 쓸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대로 차지한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 받은 것이라면… 조금은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평범했던 아침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이름 모를 작은 풀꽃도, 멀리 산자락을 오가는 작은 짐승도

    그저 지나쳐 버릴 풍경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들로 보입니다.

  • 다람쥐가 잃어버린 도토리

    가을 숲을 걷다 보면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부지런히 주워 나르는 다람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작은 몸으로 겨울 양식을 마련하느라 바쁜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한참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람쥐는 모아 온 도토리를 땅속 곳곳에 숨겨 둡니다.

    겨울이 오면 하나씩 찾아 먹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다람쥐가 묻어 둔 도토리를 모두 찾아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어디에 묻어 두었는지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잊어버림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땅속에 남겨진 도토리 하나가 싹을 틔우고, 작은 나무가 되고, 세월이 흘러 또 한 그루의 도토리나무가 됩니다.

    다람쥐에게는 잊어버린 양식 하나였을 뿐인데, 숲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다람쥐는 겨울을 준비한다고 도토리를 숨겼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행동을 통해 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내가 한 작은 일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애써 놓고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다람쥐가 잊어버린 도토리가 숲을 이루듯,

    우리의 작은 수고 하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숲속의 다람쥐를 보며 생각합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작은 도토리 하나가

    나무가 되고,

    숲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숲이 시작된 순간을 알지 못합니다.

  • 도토리묵 한 모에 담긴 어머니의 침묵

    입이 출출해질 무렵, 고요한 동네를 깨우는 정겨운 외침이 들려온다.

    “도토리 묵 사이소~”

    신문을 보던 아버지, 바느질하던 어머니.

    성미 급한 큰언니가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엄마, 우리 묵 사 먹자.”

    엄마는 말이 없다. 그저 애꿎은 떨어진 양말을 동그란 전구 위에 씌우고 바늘을 부지런히 놀릴 뿐이다.

    우리 7남매의 시선은 엄마와 언니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60년대의 가난은 묵 한 모 사 먹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우리조차 본능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엄마의 묵묵한 침묵 속에 아이들은 침만 꼴깍 삼킨다. 신문을 보던 아버지도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신다.

    학교 월사금조차 내기 버거웠던 형편에, 도토리묵이라니. 기대에 찼던 아이들의 눈망울은 이내 실망에 젖어, 빈 뱃속을 달래며 잠자리로 숨어들었다.

    요즘 산짐승들이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뉴스를 본다.

    왜일까. 숲에 먹이가 없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본래 산짐승들의 귀한 식량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마저도 욕심내어 가져와 버렸다.

    사람들은 제 먹거리도 모자라 동물의 양식까지 빼앗았고, 갈 곳 잃은 짐승들은 결국 사람의 거처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다.

    예전에는 가난해서 도토리묵을 먹지 못했지만, 이제는 동물의 먹이를 뺏고 싶지 않아 묵을 멀리한다.

    자연은 귀하다. 동물들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살아야 인간도 살아갈 길이 열린다. 사람의 편리를 위해 산을 깎아 도로를 내면서, 산짐승들의 길이 사라졌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먹이도, 자연도, 공존의 가치도 무너지고 있다.

    한도 끝도 없는 인간의 욕심은 대체 어디서 멈출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가난해서 도토리묵을 먹지 못했다.

    이제는 동물의 먹이를 빼앗고 싶지 않아 스스로 묵을 멀리한다.

    세월은 흘렀지만,

    사람의 욕심은 더 커진 것만 같다.

    오늘 밤,

    묵묵히 양말을 꿰매시던 어머니의 손끝과

    먹이를 찾아 산을 내려오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자꾸만 내 마음속에서 하나로 겹쳐진다.